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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x type=”note”] 1946년 11월 30일, 월남한 각 청년단체들은 서북청년단을 세웠습니다. 서북청년단은 ‘반공’이라는 명목으로 온갖 폭행과 살인, 학살을 저질렀습니다. 4.3 항쟁 원인 제공자이기도 한 이들은 수많은 제주도민을 학살했고, 당시 서북청년단 재건위 일원인 안두희는 백범 김구를 암살했습니다. 그들 뒤에는 정권의 비호와 재력가의 자금 지원이 있었습니다.

2014년 대한민국에 다시 ‘서북청년단’의 유령이 배회하고 있습니다. 서북청년단 재건위원회라고 밝힌 이들은 9월 28일 세월호 리본을 철거하겠다고 나섰습니다. 그 며칠 뒤 재건위 위원장 배성관은 ‘일베’사이트에 “안두희의 김구 암살은 의거”라고 주장하는 글을 올렸습니다. 이에 재건위 대변인은 배성관의 주장은 재건위의 “공식 입장이 아니”라고 반박했습니다. 촌극입니다. 하지만 웃어넘길 수 없는 코미디입니다.

대한민국 우익, 그 과거와 현재를 곱씹어봅니다. 이 글은 안수찬 한겨레 기자가 페이스북에 올린 글입니다. 필자 승낙 하에 슬로우뉴스 편집팀이 글 일부를 수정, 보완했습니다. (편집자) [/box]

출처: 제주 4.3 평화기념관
출처: 제주 4.3 평화기념관

보수주의는 프랑스혁명, 에드먼드 버크, 구한말 쇄국파, 기독교 개화파, 해방정국의 반공단체 등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지만, 오늘의 문제(일베, 서북청년단 재건위를 위시한 극우 세력의 ‘행동’)는 주로 ‘87년 체제’에서 비롯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1. 초기 우익 사회운동은 엘리트가 주도했지만, 지금은 대중운동으로 확산됐다. 

한국 우익의 실체는 반공주의다. 87년 이전까지 반공주의는 체제 이데올로기였다. ‘새마을운동본부’, ‘반공연맹’ 등 관변 단체는 있었지만, 재야 또는 시민단체는 필요 없었다. 6월 항쟁으로 직선제 개헌이 이뤄진 직후인 87년 10월, 한국 우익의 (박정희 정권 이후) 첫 재야 우익 단체인 ‘자유민주총연맹’이 등장했다. 그 주도자는 이철승 신민당 의원, 이용택 무소속 의원 등 정치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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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10월에는 반공주의 언론인과 정치인이 모여 ‘자유지성 300인회’를 만들었다. 김용갑 총무처 장관이 보수세력의 연합을 촉구했고(1988년), 양동안 정신문화연구원 교수가 “이 땅에 우익은 죽었는가”라고 격분했으며, 복거일 소설가가 “보수주의 논객을 기다리며”라는 칼럼을 쓴 것(1990년)이 모두 이 무렵이다.

다시 말해, 초기엔 (우익) 엘리트가 (우익) 대중의 각성을 촉구했다. 지금은 엘리트가 선동하지 않아도 우익 대중이 뭉치고 있다.

2. 초기 우익 사회운동은 집권 프로젝트와 관련이 깊었으나, 지금은 혐오 또는 응징 프로젝트에 기초한다. 

우익 사회운동이 태동한 배경에는 정치적 위기의식이 있었다. 87년 6월 항쟁, 92년 문민정부 출범, 97년 국민의 정부 출범 등 정치 지형의 격변 직후마다 우익 사회운동은 몸집을 불렸다. 김대중 정부 시기, 우익 사회단체의 꼴이 완성됐다. 자유시민연대(2000년), 바른사회를 위한 시민회의(2002년) 등이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개인이 참여하는 엘리트 단체가 아니라 (실체야 어떻든) 군소 단체들의 연합체가 형성됐다. 이들의 주된 관심사는 항상 다음 대선이었다.

1997년 10월 8일, 한국논단이 주최한 '대통령 후보 사상검증 대토론회'는 방송 3사에 생중계됐다. (위 자막은 토론진행자인 이도행이 김대중 후보에게 하는 말)
1997년 10월 8일, 한국논단이 주최한 ‘대통령 후보 사상검증 대토론회’는 방송 3사에 생중계됐다. (위 자막은 토론진행자인 이도행이 김대중 후보에게 하는 말)

지금은 이명박-박근혜 집권에 이어 (사실상) 차기 대권까지 보수 세력의 절대 우위가 예상된다. 오늘날 우익 사회운동은 집권하지 못할까 두려워 뭉치는 것이 아니다. 왜 무엇이 그들을 뭉쳐 다니게 만드는지를 들여다보면, 일베의 득세 및 서북청년단 재건 흐름의 특징을 알아차릴 수 있다.

3. 우익 사회운동은 미디어를 중심으로 진화했으며, 이제는 주류 미디어를 장악했다.

우익 사회운동이 둥지 삼은 첫 매체는 1989년 창간한 [한국논단]이다. [월간조선]보다 더 수구적인 매체로 평가받았다.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등도 이 매체의 논조와 거리를 두었다. 1993년~1996년까지 [한국논단]에 실린 글을 분석한 연구가 있다. 보수주의나 경제문제(시장자유주의)에 대한 논의는 거의 없고, 북한에 대한 반감이 강력하며, 한국 진보세력을 친북세력으로 바라보면서, 현대사 논쟁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는 특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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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Tube 동영상

이도형은 한국논단 20주년(2009년 9월)을 기념식에서 “반공이라는 말도 꺼낼 수 없는 나라”가 됐다면서, “젊은 서북청년이 기대되는 바입니다”라고 말한다. (동영상 2분 16초 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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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한국 우익의 ‘콘텐츠’는 조금도 변화한 적 없다. 다만, 그 ‘전파력’을 확산시켜왔다. 처음엔 [한국논단], (뉴 라이트 프로젝트 시기에 이르러) 조중동, 최근에는 종편과 인터넷까지 확장했다. 콘텐츠를 보면 극단적 반공주의 중심의 시대착오성이 분명하지만, 영향력으로 보면 체제 이데올로기 시절보다 더 강력한 토대를 갖췄다.

조중동 종편

4. 2000년대 이후 우익 사회운동을 확산시킨 것은 우익 정당이 아니라 우익 언론이다.

보수건 진보건 한국 정당정치의 미발전이라는 조건은 동일하다. 요즘은 새정치민주연합을 많이 비난하지만, 새누리당 역시 시민사회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다. 그런데 정당은 광범위한 자원 동원이 필요하다. 그 역할을 언론이 대신했다.

[한국논단]의 콘텐츠를 조중동이 끌어안은 2004년이 그 분기점이다. 계기는 노무현 정부 출범이었다. 2004년 11월부터 동아일보가 ‘뉴 라이트, 침묵에서 행동으로’라는 대형 연재 기획을 시작했고, 조선일보와 중앙일보가 뒤를 따랐다.

동아일보, [뉴 라이트, 침묵에서 행동으로]소장 학자들도 나섰다 중에서
동아일보, [뉴 라이트, 침묵에서 행동으로]소장 학자들도 나섰다 중에서
처음에는 ‘자유주의’에 착안했지만, 결국 ‘반공(반북)주의’로 귀결됐다. 2004년 말, 이동관 동아일보 정치부장(나중에 청와대 대변인)과 우익 인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자유주의 운동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자유주의’가 어려우니 ‘뉴 라이트’라고 작명하자는 아이디어가 나왔고, 이를 동아일보가 기획기사로 펼쳤다. ([신동아] 2008년 9월호)

이후 2년여 동안 조중동의 뉴 라이트 기사는 흥미로운 변화를 보였다. 관련 보도 건수를 중심으로 보면, 초기엔 동아일보가, 중기엔 중앙일보가, 막판 특히 대선 직전에는 조선일보가 집중 보도했다. 프레임을 보면, 초기 동아일보와 중앙일보는 시장자유 등 자유주의 담론에 초점을 맞췄지만, 나중엔 조선일보의 ‘반공/반북 프레임’으로 수렴됐다.

결국, 뉴 라이트는 자유주의를 버리고 반북주의를 택했고, 그 흐름은 오늘날 종편의 각종 ‘반공/반북 프로그램’으로 이어진다. 극소수 엘리트만 들여다보던 [한국논단]이 아니라,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종편을 통해, 인터넷의 (자칭) 우익 활동가들은 수시로 다양한 증오와 혐오의 소스를 얻고 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앞으로도 아주 오랫동안 변하지 않을 것이다.

5. 보수집권 이후, 우익 사회운동의 초점은 ‘각성’에서 ‘행동’으로 변했다.

[한국논단] 그리고 조중동의 ‘뉴 라이트 기획’의 핵심은 ‘현대사 바로 세우기’였다. 이 프로젝트는 전교조 탄압, 교과서 개편 등으로 지금도 진행 중이다. 그런데 그것은 이른바 ‘상층 엘리트의 관심사’다. 우익 사회운동은 다른 타깃을 찾았는데, 바로 ‘직접 행동’이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인 2009년 3월, 국민행동본부 산하에 ‘애국기동대’가 만들어졌다. 해병대·특전사 출신 90여 명으로 이뤄진 애국기동대는 출범 선언에서 다음과 같이 맹세하며, 출범식 직후에는 무술 시범도 보였다.

  • “반헌법적 좌익 폭도들과 싸운다”
  • “좌익들의 패륜적 테러에 대해 정당방위적 자위권을 행사한다”
  • “연방제 통일을 주장하는 종북 반역 세력을 공동체의 적으로 규정하고 이들을 제거하는 일에 목숨을 바친다”

이번에 등장한 ‘서북청년단 재건위’도 비슷한 정서와 목표를 갖고 있을 것이다. 박근혜 정부 시기 내내 이런 ‘우익 행동주의’는 더 강화될 것이며, 보수정권이 다시 한 번 집권한다면 그 흐름이 더 확산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우익 담론과 우익 행동은 완전히 다르다. 전자는 논쟁의 영역이지만, 후자는 생명의 영역이다. 우익 행동은 린치와 테러로 이어진다. 이 대목에서 파시즘의 징후를 조심스럽게 잘 읽어야 한다.

미국과 유럽에도 극우 정당이 있다. 극우 단체도 있다. 따라서 극소수 우익을 지나치게 과대해석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극우 정당과 단체가 의회 진출이 아니라 직접 행동을 감행하면, 미국과 유럽은 국가의 이름으로 강력히 끝까지 뿌리까지 처벌한다. 한국의 보수정부가 그 방식으로 움직인다면 참말이지 다행이다. 안 그런다면, 보통 일이 아니다.

6. 아직은 파시즘이 아니다. 그러나 그 징후는 있다.

파시즘은 광범위한 ‘파시스트 대중운동’을 애견처럼 데리고 다닌다. 이것이 보수정권과 파시스트 정권의 차이다. 다시 말해 보수 정권이 곧 파시스트 정권인 것은 아니다. “파시즘이 등장했다”고 함부로 떠들면, 진짜 파시즘의 등장을 방치하는 ‘거짓 양치기’가 될 수 있다. 박근혜 정권은 기껏해야 공안정권 정도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광범위한 실업자 집단은 분노의 출구를 찾고 있다. 한국에서 가장 소외된 집단은 노인이다. 장기 실업이 불가피한 20~30대도 소외집단이다. 그 분노의 타깃을 어디로 정할 것인지 그들은 찾고 있다. 주류 미디어와 인터넷은 북한 및 친북 세력이 그 타깃이라고 매일 선동하고 있다. 일베와 서북청년단은 강남 부유층이 주도하는 사회운동이 아니다.

파시즘의 여러 징후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특정 집단에 대한 적대감의 확산’이다. 특정 집단에 대한 광범위한 적대감을 정권이 선동하고, 이를 대중이 접수하여, 본격적인 응징 행동(린치와 테러)이 시작되면서, 정권이 이를 방치하거나 방조하면, 그것이 파시즘이다.

아직 한국에선 정권이 이를 선동하지 않는다. 다수 대중이 이를 접수하지도 않았다. 본격적인 응징 행동이 가시화되지 않았으며, 정권이 이를 노골적으로 방치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 징후를 잘 들여다보아야 한다. 백지장 한 장 차이다.

7. 고립돼있던 몇몇 징후가 동시다발하면 민주주의는 갑자기 무너진다.

나오미 울프
출처: 위키백과 공용

미국 사회비평가 나오미 울프(Naomi Wolf, 사진)는 ‘파시즘으로 향하는 이행기’를 발견하는 지표를 제시했다. 아래 지표들이 합쳐져 민주주의를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하면, 어느 순간 민주주의가 급작스럽게 퇴보한다고 경고했다.

  • 집회·시위에 나서거나 비판적 발언을 하면 신체적 위협을 가한다. 시민들의 무차별 체포와 투옥을 꺼리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민간의 ‘준군사조직’이 등장한다.
  • 일반 시민을 사찰한다. 도청을 합법화하고 개인의 전과와 정치 성향, 사생활 등을 기록한 개인 자료를 활용한다.
  • 교수·공무원·언론인·문화예술인 등 비판적 인사들을 전략적으로 겨냥해 직장에서 쫓아내거나 경력을 파괴한다.
  • 시민단체에 첩자를 심어 조직을 파괴하거나 국세청의 세무조사 등으로 괴롭힌다.
  • 비판적 검사를 해임하는 등 법의 지배 방식을 뒤엎는다. 인격모독을 포함한 고문, 근거 없는 고발, 저지르지 않은 범죄에 대한 마구잡이 기소 등의 사법독재가 등장한다.
  • 정치적 압박으로 자유언론을 탄압한다. 언론인을 모독하거나 수치심을 주고, 해당 언론의 책임자들이 언론인을 해고하게 만든다.
  • 시민들의 사상·행위·표현을 범죄로 만들기 위해 불법행위의 범주를 새롭게 만들어낸다. 새로 법을 만들거나 개정해 ‘법의 이름으로’ 처벌한다.
  • 일련의 과정에서 안팎의 위협을 부각시킨다.

8. (만에 하나) 파시즘이 등장한다면, 자유주의 및 좌파 세력은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파시즘은 민주주의 국가에서만 등장한다. 민주주의가 좋은 정치를 만들어 내지 못하면, 그에 대한 반동으로 등장한다.

1919년 이탈리아 무솔리니가 사상 처음으로 파시스트 운동을 시작했을 때, 그것은 퇴역군인, 언론인, 지식인 등을 모아 “민족주의에 반하는 사회주의와의 전쟁을 선포”한 운동이었다. 내부의 적에게 가차 없는 폭력을 휘둘러 축출하는 정치·사회 운동으로 확산됐다. 나치즘은 정권을 먼저 장악하고 대중을 무장시켰지만, 파시즘은 사회운동에서 시작하여 정권을 잡고 이후엔 국가의 이름으로 계속 증오의 폭력을 저질렀다.

히틀러 무솔리니
나치즘은 먼저 정권을 잡고 대중을 무장했지만, 파시즘은 사회운동에서 시작해 정권을 잡았다. (사진: 히틀러, 무솔리니, 위키백과 공용)

증오의 사회운동이 번지게 하는 무능, 집권했어도 좋은 정치를 구현하지 못하는 무능 때문에 무솔리니와 나치가 등장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한국의 민주세력( 및 진보세력)은 대체로 보아 무능했다. 물론 민주주의/자유주의 제도언론과 대안언론도 그 책임을 벗을 수는 없을 것이다. 87년 체제가 낳은 ‘반보수-반독재 집권’의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행동하는 우익 사회운동’의 저변은 계속 더 확대될 것이다.

소외당하고 외로운 이들은 반드시 분노의 출구를 찾아내고야 만다. 범죄를 저지르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누군가를 해친다. ‘생의 욕망’을 이해해야 일베와 서북청년단을 볼 수 있다.

이명박 정권 시절, 썼던 기사가 하나 있다. 이명박 정권은 파쇼 정권이 아니었다. 박근혜 정권도 그렇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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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댓글

  1. 도대체 어떤 경로로 나오미 울프를 접하게 되셨는지는 모르겠는데, 저라면 저 여자를 ‘사회비평가’라고 인용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마침 본문에 위키피디아 페이지 링크 주셨는데, 한번 들어가서 읽어 보시길 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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