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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서른을 넘어서면서부터 여기저기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청첩장

“친구야, 나 결혼한다!”

요즘은 스마트 기기가 일상화해서 청첩장도 이미지 전송이 가능한 메시지 앱이나 문자로 보내기도 한다. 때로는 소셜 서비스를 이용하기도 한다. 한참 연락이 없던 친구든 늘 자주 만나고 이야기하던 친구든 혼례식에 초대하는 메시지를 보내는 방식에선 별반 차이가 없다. 불만의 정도에서 차이가 있다면 모를까.

이럴 때 간혹 사람들은 축의금을 얼마나 내야 하는지 스스로 정하지 못해 주변 친구들에게 묻기도 한다. 나도 그런 질문을 받아본 일이 있다. 축의금을 얼마나 내야 할지 모르겠다고. 이럴 때마다 내가 대답하는 말은 하나뿐이다.

“어디서 하느냐가 중요하지. 보기 그럴싸하고 밥값이 그만하면 그만큼 내야 하지 않겠어?”

나는 냉소적으로 답한다. 어차피 신랑 신부 구경거리 만드는 혼례식이라면 손해 볼 짓은 하지 않는 편이 좋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오늘날 대부분 결혼식은 그날의 주인공이며 누구보다도 축복을 받아야 할 신랑 신부를 구경거리로 만드는 성격이 짙다.

기쁨보다 걱정부터 앞서는 ‘결혼식’

혼례가 집안과 집안의 만남이 되어 온 것은 아주 최근까지의 일이다. 그리고 지금도 이러한 생각은 젊은 사람들 사이에조차 적잖아 남아있다. “혼례식은 부모의 얼굴이요, 장례식은 자식의 얼굴”이라는 말이 여전히 낯설지 않은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장례식이야 고인의 명복을 비는 산 자들의 행사이니 ‘자식의 얼굴’임이 어느 정도 수용할 수 있지만, 혼례식은 이제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은 나만 하는 생각은 아닐 것이다.

누구나 뜬금없는 혼례 소식에 부담감이나 불쾌감을 느낀 경험이 있다. 특히 오랜 시간 다소 소원했던 이가 혼인을 한다며 보내오는 소식이라면 더욱 그렇다.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아주 가깝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멀지도 않은 사이였는데 축의금은 얼마나 해야 하나 하는 고민은 누구나 한 번 이상 하며 산다. 분명 축하해야 할 일이고 기쁜 일인데도 기쁘고 대견하기보다는 고민이 앞서는 이상한 경우가 있다.

이것은 하객이 아닌 당사자의 입장일 때 더욱 심해지기도 한다. 가장 축하를 받아야 할 당사자들이 받는 스트레스는 이만저만이 아니다. 때로 그 스트레스가 파경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전혀 없지는 않다. 게다가 혼례식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가족관계가 악화해 회복하는 데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거나, 드물게는 회복이 안 되는 경우도 있다.

Eugenio, CC BY SA
Eugenio, CC BY SA

“서로 이해하고 양보해야 한다”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이런 건 해결책이 아니다. 이것이 과연 과욕 때문이거나, 사람 관계를 관리하는 기술의 문제일까? 어쩌면 이것은 작금의 혼례식 형태가 근본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문제는 아닐까?

코넬대학 연구, 한·중·일(집안 종속적) vs. 서구(관계 중시)

코넬 대학에서는 20년에 걸쳐 가족문화와 아이의 성장이 어떤 식으로 관계 맺는지 연구한 적이 있다. 유아교육 분과에서 이뤄진 이 종단연구(Longitudinal Study)의 중간보고서 격으로 나온 2007년 학술지에선, 아시아에서 건너온 이민자 가족의 특성을 집단주의적(Collectivistic)이라고 말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한·중·일 3국의 가정에서 그런 특성이 도드라진다는 것이 그 연구에서의 지적이었다. 자녀의 성장 패턴과 연관된 연구이지만, 이 학술지에서 말하는 집단주의적 가족문화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서구사회(앵글로 색슨, 라틴, 슬라브 계통)의 가족 중심성은 구성원들 각각을 중심으로 하여 관계 기반(Relationship-based)의 가족 형태를 특징으로 하는 데 반해 한중일 3국의 이민자 가정은 가족 집단이 중심이 되어 구성원들이 거기에 예속되는 형태를 띤다. 다시 말해 한중일 3국 출신의 가정은 흔히 말하는 ‘집안이 중요하다’는 식이고, 서구사회의 가정은 가족 구성원 개개개인의 애정 관계가 중요하다는 식이다.

가족의 탄생
“피 한 방울 안 섞인 가족의 탄생”, [가족의 탄생](김태용, 2006)

결혼식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이 빤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이렇게 빤한 사실에 균열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가족형태가 예전과 같지 않다는 것쯤 이젠 생소한 이야기가 아니다. 대부분 가정은 부부 중심으로 바뀌어 있으며, 시월드나 처월드에서 지내는 젊은 부부들은 희귀종 취급을 받는 실정이다. 다시 말해 혼인 후 가정의 중심은 ‘집안’이 아니라 ‘부부’라는 것이다.

가정을 이룬 뒤 살아가는 데서 중심이 되는 것이 그들이라면, 가정을 이룬다고 공표하는 행사에서 주인공이 되어야 할 이들도 마땅히 그들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여전히 그것을 공표하는 행사에서는 그들이 주인공이 아니다. 신랑 신부의 역할은, 심하게 말하자면 그날의 가장 큰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양가 부모가 주인공인가 하면, 꼭 그렇게 볼 수 없다. 그들도 하는 일이라곤 정장이나 한복 차려입고 앉아 있다가 한두 차례 일어나 촛불 켜고 인사 주고받는 것이 고작이다. 가끔 주례 대신 축사도 읊는다.

축하해주겠다며 오는 손들은 어떤가? 그들은 당연히 주인공이 아니다. 그들이 하는 일은 이름 써 붙여 축의금 내고, 그날따라 몇 시간씩 공들여 치장한 신랑 신부 구경한 뒤 식권 받아 잔칫상 앞에 모여 ‘신부 화장이 어땠네, 신랑이 어떻네’부터 시작해서 부동산 시세나 자녀교육 정보를 주고받는 일 등이다. 정작 축하해 줄 신랑 신부와 이야기할 기회는 식전 식후 몇 분 정도에 불과하다.

오늘날 결혼식장은 결혼식 공장이라고 불러야 할 판이다. 천편일률로 결혼식을 찍어낸다.
오늘날 결혼식장은 결혼식 공장이라고 불러야 할 판이다. 천편일률로 결혼식을 찍어낸다.

모두 구경꾼으로 전락하는 이상한 스펙터클 

어쩌면 혼례식이라는 거대한 스펙터클(구경거리)에서 진정으로 이 축제를 즐기는 이들은 아무도 없는 것이 아닐까? 바꿔 말해서, 오늘날의 혼례식은 거기에 참석하는 모든 사람을 주변화시키는 것은 아닐까?

참석하는 누구도 행사의 주목적이 되는 테두리 안에 들지 못한다면, 적어도 일종의 분열증적인 현상이라고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목적은 혼례를 알리고 축하를 받는 행사인데, 아무도 혼례의 주체가 되지 못한다. 형식적으로 부부연을 맺는다고 신랑 신부가 주체가 되는지는 의심스럽기만 하다.

이제 ‘부부’를 주인공으로

혼례가 집안과 집안의 만남이 아닌 사람과 사람의 만남으로 변해가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혼인 이후 삶은 부부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면, 혼례식 역시 마땅히 신랑 신부가 주체로서 치르는 것이 온당하다. 그리고 그들을 중심으로 다른 이들 역시 신랑 신부의 약속을 지켜보고 축하하며 함께 기뻐해야 하지 않겠는가? 대안이 될 만한 형식이야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행사의 목적이 충실히 이루어질 것인지의 여부이다. 하객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오랜 시간을 함께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 어서 부부됨을 발표하고 뜨끈한 여행지로 냉큼 떠나고 싶다면 그렇게 해도 큰 문제는 없겠다.

다만 정성을 쏟아 모든 사람을 주변화시키는 알맹이 없는 행사를 치를 필요까지는 없지 않을까. 많아 봐야 서너 번 이하일 인생의 큰 행사를 고작 축의금 거래로 전락시키는 일이 옳지 않다 여긴다면 말이다.

HARRY NGUYEN, CC BY
HARRY NGUYEN, CC 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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