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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 서비스 페이스북 이용자 정보란에는 가끔 “출신학교와 학번을 밝히지 않습니다”는 문구를 학력 소개로 걸어놓는 걸 볼 수 있다.

출신학교와 학번을 밝히지 않습니다
페이스북 이용자 정보란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출신학교와 학번을 밝히지 않습니다”

“출신학교와 학번을 밝히지 않습니다”

취지는 좋다. 하지만 표현이 이상하다. “학번”은 관습적으로 ‘대학교’ 입학연도를 가리키는 것일 텐데, 대학에 들어간 적 없는 사람은 어쩌란 말인가. 아, 이 문구는 대학교에 입학했던 사람들 안에서만 학벌주의 폐단을 경계하자는 그런 취지인가? (당연히 그런 취지는 아닐 테다.) 왜 굳이 “출신학교를 밝히지 않습니다”가 아니라 거기에 더해 “학번을 밝히지 않습니다”일까?

학번 있는 사람 없는 사람
아직 우리 사회에선 ‘학번이 없는 사람’이 더 많다.

종종 어떤 취지는 그 취지를 표현하는 형태와 방식에 의해 스스로를 해체한다. 몸과 마음은 일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몸과 마음을 일치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내 마음(이성)은 내 몸(욕망)의 주인은 아니지만. 나는 이 문구가 어딘지 모르게 불편했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런 이유가 아니었나 싶다.

나라면, “출신학교? 알아서 뭐하게?”라고 문구를 바꾸겠다.

언어가 만드는 차별, 차별을 깨뜨리는 언어

언어는 정말 끔찍할 정도로 계급과 차별에 관여한다. 소수와 다수를 나누고, 전문가와 비전문가를 구별한다. 언어가 사람의 도구라면, 그 언어는 사람의 욕망을 반영한다. 특히 계급적 욕망을 반영하고, 배제와 차별을 은연중에 합리화하고 정당화한다. 하지만 언어를 통한 차별을 깨뜨릴 도구 역시 언어일 수밖에 없다.

“출신학교과 학번을 밝히지 않습니다”라는 문구는 ‘학벌없는사회’(페이스북은 ‘여기’)에서 캠페인 일환으로 창안한 것으로 보인다. 거듭 말하지만, 나는 ‘학벌없는사회’가 행한 캠페인 취지를 아주 좋게 생각한다. 그 본래의 취지는 출신학교(이른바 ‘학교 서열’)로 차별하지 말고, 학번(나이)으로 반말하지 마!라는 것일 테다.

하지만 그 마음(취지)을 전달하는 형식(방법)이 또 다시 누군가(대학에 가지 않은, 가지 못한 많은 이들)를 배제하고, 차별하는 건 아닌지 세심히 살피고,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학벌없는 사회
학벌없는사회 ‘출신학교와 학번을 밝히지 않습니다’ 페이스북 게시물 중에서

세상에서 당신을 가장 궁금해하는 누군가?

세상에서 당신이 가장 궁금한 건 누구일까? 당신의 부모님 또는 연인 혹은 당신의 친구일까? 세상에서 당신을 가장 궁금해하는 당신 주변에 있는 어떤 소중한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건 어쩌면 페이스북일지도 모르겠다. 페이스북은 끊임없이 내가 어디에 사는지 묻고, 내가 어떤 학교를 나왔는지 묻는다. 내 직업을 묻고, 내가 좋아하는 영화과 음악, 책과 스포츠를 묻는다.

사랑하면 알고 싶은 게 인지상정인데, 그럼 페이스북은 나를 사랑하는 걸까? :D

페이스북이 나에게 끊임없이 묻고, 그 질문 항목을 채워서 얻어내고 싶은 건 뭘까? ‘사람과의 만남’, 그 가능성일까? 페이스북은 당신의 취향과 사회적인 표지들, 그리고 출신 지역과 지금 사는 장소 등등의 정보를 바탕으로 당신에게 어울리는 ‘친구’를 소개하고, 이어주려는 것일까? 굳이 페이스북이 하지 않아도 우리는 이미 ‘끼리끼리’ 만난다.

페이스북이 당신을 ‘프로파일링’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상품’의 소비이고, 그 소비를 촉진할 수 있는 ‘광고’와의 만남일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 그런 의미에서 페이스북이 이어주는 건 ‘사람과 사람’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사람과 상품’이다.

페이스북 정보 업데이트 페이지
페이스북은 정말 내가 무지하게 궁금한가 보다.

죽은 디지털 노마드의 시대

나는 이게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미디어형 비즈니스가 추구할 수밖에 없는 당연한 사업모델이라고 생각한다. 이 최종 목적을 위해 다양한 편의와 장치들을 페이스북은 기꺼이 이용자에게 제공하고, 이용자들은 그 편의적 장치들을 통해 소식을 올리고, 마음을 나누며, 친구를 사귄다. 다 좋다. 좋은데, 하나 아쉬운 건 있다.

점점 더 우리는 페이스북의 호구 조사 틀, 그 프레임에 갇힌다. 페이스북은 누구의 의견도 묻지 않고, 어떤 선택권도 주지 않은 채로 휙휙 디자인을 바꾸고, 우리를 어느새 ‘좋아요’의 노예로 만들어버렸다. 그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학벌과 성별과 지역과 나이와 사회적 지위에 상관없이 나누던 시절, 익명성이라는 위대한 토양 속에서 ‘새롭게 태어났던’ 블로거들은 이제 다 페이스북으로 트위터로 입주해 있고, 자신의 집을 버렸다.

한때 디지털 노마드(유목민)란 말이 유행한 적 있다. 바야흐로 우리는 디지털 오디세이를 펼쳐보지도 못한 채 페이스북이라는 거대하고 안락한 닭장에 갇힌 채 끊임없이 호구 조사를 강요당하는 페이스북 신민이 되어버린 셈이다.

물론 페이스북을 위시한 소셜 서비스, 그리고 카톡과 왓츠앱, 라인과 같은 모바일 메시징 서비스는 우리 시대의 거대한 흐름이고, 이른바 대세다. 그 흐름을 나 혼자 외면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홀로 고립하는 것도 현명한 것 같지는 않다. 그 속에서 섞여서 어떻게든 대화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야 한다.

그럼에도 거대 서비스의 비즈니스 모델의 수단으로 그 수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대상으로만 전락해 가는 우리 모습은 여전히 깊은 아쉬움을 남긴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늘 새롭게 다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출항하는 배
어렵지만, 늘 새롭게 다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진: Cpt HUN, CC 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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