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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x type=”note”]역사는 과거에 머물지 않습니다. 과거와 대화하며 지금, 여기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순간순간 역사를 만들어갑니다. 이는 슬로우뉴스의 일관한 입장입니다. 문창극 총리 후보 검증과정에서 불거진 박유하 교수의 책, [제국의 위안부](2013) 논란은 학술 논의의 장, 사상 시장의 자율 경쟁 메커니즘의 장에 머물지 않고, 이제 법정으로 갔습니다. 슬로우뉴스는, 늘 그렇듯, 이 사안에 대한 다양한 입장 개진과 기고를 환영합니다. (편집자) [/box]

영화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2013)는 개별적 역사가 종합적 역사로 나아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메타포로 볼 수 있다. 각자의 기억에 없었던 사건의 전말이 드러나며 영화 속 인물들이 믿었던 진실은 속절없이 무너지고, 마침내 해당 사건의 전체 윤곽이 드러난다. 그러나 의미심장한 마지막 롱테이크는 우리가 말하는 종합적 역사가 무엇을 간과하는지를 아프게 보여준다.

영화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 소개 팜플렛
영화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아쉬가르 파라디, 2013)
심한 우울증으로 사실상 사건의 중대한 원인을 제공했던 사미르의 아내는 바람피운 남편에 대한 증오로 괴로워하면서도 남편의 냄새에 눈물 한줄기를 떨구는 삶의 모순을 보이는 인물이다. 그러나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는 전 과정에서 그러한 모순은 가려져 보이지 않았음을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시사한다.

거시적 역사가 지닌 시각성과 단순성

역사. 우리가 역사로 부르는 것은 어느 정도의 총체성을 지니더라도 개인의 삶이 지니는 모순점들을 일일이 보여줄 수는 없다. 가려진 개인의 기억은 역사에 가려 시야에서 벗어난다. 이것이 거시적 역사가 지닌 시각성이다. 이 시각성은 역사를 바라보는 거시적 관점의 구도가 경직되어 있을수록 총체성으로부터 멀어지며 그만큼 많은 것들을 시야에서 배제한다.

거시적 관점의 경직성이란 바꾸어 말하자면 단순성이라고도 할 수 있다. 가해자와 피해자, 지배자와 피지배자 같은 이분법적 구도가 대표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분법보다는 약간 더 복잡한 형태지만, 우리가 흔히 ‘성군’으로 숭앙해 마지 않는 세종대왕의 예를 들어보자.

세종대왕, 천체관극기술이 발전한 이유 

세종대왕의 치적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새로운 활자기술로부터 시작하여 정확한 천체관측기술, 영토확장,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글창제라는 전무후무한 업적이 있다. 그러나 이를 근거로 단순히 세종은 백성을 사랑하는 애민군주였다고 말할 수 있을까?

민음사에서 출간한 한국사 시리즈는 이에 관해 의미 있는 설명을 제공한다. 그 첫 권에 해당하는 [민음한국사 조선01: 15세기 조선의 때 이른 절정]에는, 당대의 과학기술 특히 천체관측기술은 그것이 과학기술을 중시하는 풍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왕조의 정당성을 보증하고자 한 의도라고 봄이 온당하다는 지적이 있다.

세종대왕
세종대왕의 초상. 이 작품은 만 원권 속 초상으로도 익숙하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민족의 성군 세종대왕의 초상, 우리가 늘상 접하는 이 만 원권 초상을 그린 이는 일제 말기 대표적인 친일화가 운보 김기창(1913~2001)이다.

애민군주 vs. 왕조의 정당성

왕은 하늘이 내는 것이며 따라서 조선왕조가 천명을 받았음을 정당화하는 것이 당대 천문학의 역할이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자면 세종조의 과학기술 발달은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백성의 편익을 위한 기술개발이기보다는 성리학적 질서에 충실한 통치의 부수적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왕의 치적이라는 거시적 프리즘으로만 본다면 세종대왕은 세계사에서도 찾기 힘든 성군이며 애민군주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그 왕조의 정당성에 대한 당대의 통념을 아울러 살필 수 있는 시각을 견지할 때 우리는 좀 더 온전히 과거를 돌아볼 수 있다. 지난 시대를 어떤 프리즘으로 보는지에 따라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이 나뉘는 셈이다. 그러기에 과거를 되돌아봄에 있어 더 많은 것들을 드러낼 수 있는 시도가 지속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제국의 위안부] 그 ‘학술적’ 시도와 한계

최근 쟁점의 중심부에 놓인 박유하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는 이런 점에서 평가받을 만한 시도로 보인다. 일본의 식민지였던 시절 우리나라가 피해자였음은 부인할 길이 없으나, 가해자와 피해자의 이분법적 프리즘으로만 당대를 돌아볼 때 시야에 잡히지 않는 것들을 드러내려는 시도로 읽힐 수 있다는 말이다.

이는 일본의 국가적 범죄를 은폐하려는 시도가 아니다. 오히려 국가적 차원에서 벌어진 범죄가 내부적으로 어떤 폭력과 모순을 양산해냈는지를 세밀하게 살피기 위해 더 정교한 프리즘을 설계하는 일이다.

하지만 한계도 분명하다. 정교한 프리즘을 설계한 것이 무색할 정도로 현재의 교착상태를 진단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데선 거칠고 단순하다. 말하자면 문제의식에서 해결로 나아가는 과정에서의 논리적 모순이 일어난 것이다. 이점은 반드시 비판을 받아야 하며 앞으로 보완해야 할 사안이다.

제국의 위안부

박노자의 비판, “누굴 “용서”하라 하십니까?”

박노자 교수의 비판은 이점을 정확하게 지적한다.

박유하 교수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십니다: “현대 일본에 존재하는 그런 이들과의 연대가 중요하다면 비인간적인 시스템속에서 그나마 인간적이려 노력했던 과거의 그들의 행위와 기억이 무시되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무엇보다 그런 일들을 떠올리는 것은 면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배와 폭력의 기억을 떠올리는 한편으로 용서하는 힘을 기르기 위해서입니다. 그 용서는 일본을 위해서가 아니라 저희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미움이라는 트라우마에서 해방되기 위해서이지요.”

현재의 일본인이든 한국인이든 가장 득 볼 것은 범죄조직인 일본/한국 등 “국가”의 과거 깡패행각에 대한 법적인 엄중한 처리입니다. 왜냐하면, 한 번 그런 처리가 있은 다음에 국가 폭력 조직 (군대 등) 종사자들이 약간 버릇이 좋아져 다시 한 번 비슷한 류의 짓을 저지르기 전에 두 번 생각해본단 말입니다. 현재 살고 있는 일본인에게도 한국인에게도 최악의 적은 바로 일본/한국 국가인 만큼 국가에 너그럽다는 것은 그 인민에 대한 가혹성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드디어 “핵심 문제”로 도달했습니다. 박유하 교수는 도대체 위안부 할머니나 우리 모두에게 누굴 “용서”하라 하십니까? 개개인으로서의 일본인을? 양심 있는 일본 분들이 나눔의 집에서 봉사하시기도 하고 일본에서 위안부 문제의 진정한 해결을 위해 싸우기도 하고 하시는 것은 다들 아는 일이고, 위안부 할머니 분들은 개개인의 일본인에 대한 배상요구를 하시는 게 아니라는 점도 주지의 사실입니다.

개개인으로서의 일본인 및 한국인 사이는 “용서”할 일도 따로 없고, 서로 연대를 잘해서 양쪽 국가/기업과 싸우면 될 일이고, 이 문제와 관계 없는 일입니다. 여기에서 문제의 대상은 일본국이라는 “국가”죠. 일본국을 용서하라는 것입니까? 일본국이든 대한민국이든 비슷한 수준의 사실상의 깡패조직인데 그 조직을 “용서”하고, 그 조직과 “화해”한다는 건 도저히 무슨 의미를 내포하는지, 알다가 모를 일입니다. 국가를 사랑하라 하면 분명히 당장에 국가주의로 판단이 나올 터인데, 국가를 사랑하라는 말이나 국가를 용서하라는 말이나, 과연 그렇게 다른가요?

– 박노자, [‘용서’라는 이름의 폭력] 중에서

학술적 논란의 장을 떠나 ‘법정’으로 간 [제국의 위안부]

문제는 이 같은 논의가 법정으로 갔다는 데 있다. [제국의 위안부] 출판, 판매, 발행, 복제 등 금지 가처분 소송을 맡은 박선아 교수(나눔의 집 고문변호사)는 한 라디오 방송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박선아:
우선 저희가 헌법을 아는 사람의 입장으로서 표현의 자유라는 것이 있고, 학문의 자유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이것이 대학 교수라고 하는 학자에 의해서 쓰여진 역사서 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학문적 영역 내이고 그것이 학자적 양심에 의한 의견과 판단해석 이라고 한다면, 과연 그 부분에 있어서 일부 피해자들의 인권을 침해하는 부분이 있더라도 그것을 학문적으로 풀어가는 것이 바람직 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현저히 벗어나서, 명백하게 허위사실을 기술하고 도저히 묵과할 수 없을 정도의 피해자들의 명예를 훼손하고 있다면 아무리 학자가 쓴 글이라고 하더라도 법의 심판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해서, 저희가 그 한계선 상에서 굉장히 많은 고민을 하였습니다.

앵커:
한마디로 학문적 자유와 허위사실 이라는 의혹이 되고 있는 부분을 어떻게 구분해야 하느냐의 문제냐고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어떤 내용을 담고있길래 그것이 허위사실, 묵과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생각을 하시게 된 거죠?

박선아:
그 책이 300페이지 정도 되는데요, 그 책이 전반적으로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해서 동지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라든가, 일본군의 협력자 라고 한다든가, 매춘의 틀 안에서 이해할 수 있다는 그러한 내용들, 그리고 일본의 창기의 고통과 다르지 않다는 것들이 개별적인 서술이고요. 아까 사회자님 말씀하셨던 것처럼 출판사 대표가 전체적인 맥락과 의도를 고려하지 않았다는 말씀하셨는데, 사실은 저희가 전체적인 맥락과 의도 같은 경우에는 추정되는 의도, 그러니까 책을 읽어보고 객관적인 일반인으로서 느껴지는 맥락과 의도라는 것은 더욱더 저희는 위험하다고 봤습니다.

– YTN 신율의 출발 새아침, “세종대 박유하 교수 저서 <제국의 위안부>위안부 피해 할머니 비하 논란”-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박선아 교수 인터뷰 중에서 (2014년 6월 17일)

“동지적인 관계”라는 표현은 박유하 교수의 문제의식에서 정교한 프리즘 설계를 위한 핵심적인 장치에 해당한다. 그러한 장치를 이용할 때 식민지 시대를 살아낸 위안부들의 모순된 삶과 그들에게 가해진 갖은 폭력을 세밀하게 살필 수 있다고 박유하 교수는 믿는 것 같다.

이 표현이 문제였다면 ‘형식적 동질성’ 내지는 ‘기능적 동질성’과 같은 보다 딱딱한 용어로 바꾸어 달라고 요구했을 법도 하다. 그러나 박유하 교수 본인으로부터 확인한 결과, 수정이나 해명에 관련한 요구는 없었다고 한다.

법과 법정의 시각성

이것을 곧바로 소송으로 가져간 박선아 교수의 설명은 법이라는 공적 영역의 시각성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동지적 관계’라는 장치로 설계된 시각에서 그 장치를 떼어 법정으로 가져가는 것은, 떼어낸 부분에 연결된 논지-맥락을 대중의 시야에서 사라지게 하기 때문이다.

법정이라는 ‘시공간’의 시각성이 있다. 그것은 역사의 시각성보다도 그 프리즘이 단순할 수밖에 없다. 상대적으로 역사가 이미 지나간 것에 관한 되돌아봄인 반면 법정은 현재 진행형적인 속성이 좀 더 강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관중석 꼭대기에 있는 카메라와 그라운드 옆에 있는 망원카메라 사이의 시각차이에 비견할 수 있다.

현장성이라는 것이 전체를 조망하는 시야를 가리고 ‘동지적 관계’라는 선수의 움직임(표현 자체)에만 초점을 맞춤으로써 경기 전체(논지의 맥락)를 보기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보이는 것 보이지 않는 것
Send me adrift, CC BY NC ND

보이지 않는 것은 인식의 대상에 해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가려진 맥락이 논의의 대상이 되기는 어렵다. 통념상 위안부 문제는 비단 위안부 할머니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일본의 제국주의 야욕에 피해를 당한 우리나라 전체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는 국민 모두가 ‘맥락’을 살펴야 한다는 의미도 지닌다. 그러나 반복하건대, ‘법정’에 담긴 시각성은 맥락을 보려는 시각을 방해할 공산이 크다.

이미 그러한 현상은 나타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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