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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을 졸업할 즈음 나는 몇 가지 이유로 대학원 진학을 포기하고 취직을 준비했다.

# 1. 사전은 돈이 안 된다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은 라디오 PD였다. 하지만 실력이 부족한 데다 워낙 문이 좁아 기자 준비를 같이 했다. 그러면서도 출판 편집자, 그중에서도 인문서나 사전 편집자를 꿈꿨다. 사전 편집자를 꿈꾼 것은 졸업 직전 학기에 한영균 선생님의 사전편찬학 입문 강의를 무척 흥미롭게 들은 것이 계기였다.

졸업하던 해 모든 언론사 입사에서 낙방했다. 다행히 두산동아에 편집자로 입사하게 됐다. 짧은 수습사원 기간이 끝나고 희망 부서를 적어내라고 했을 때 나는 1지망에 사전팀을 썼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종종 나중에 상무가 된 인사(HR)팀장에게 언젠가 사전팀으로도 갈 수 있을지를 물어봤다. 그는 그때마다 “물론이지”라고 답했다. 아마도 진심은 아니었을 것이다. 사전은 돈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럼 자네들 월급 정도는 스스로 벌어 오시게"
사전편집부에 자기 월급 정도는 벌어오라고 핀잔을 주는 겐부쇼보의 무라코시 국장(영화 ‘행복한 사전’ 캡처)
사전은 돈이 안 된다고 말하는 겐부쇼보의 무라코시 국장 (영화 '행복한 사전' 캡처)
사전은 돈이 안 된다고 말하는 겐부쇼보의 무라코시 국장 (영화 ‘행복한 사전’ 캡처)

실제로 내가 그 회사를 나와 지금 몸담은 곳으로 옮긴 2008년 말께 두산동아는 구조조정을 하면서 사전팀을 포함한 어학 부문을 자회사로 분리했다. 사전팀의 구성원들은 아마 퇴사 후 자회사로 재입사 같은 과정을 거쳤을 것으로 추측된다. 나중에 본사가 일부를 다시 흡수하긴 했지만.

어쨌든 나는 아쉽게도 사전 편찬 일을 할 기회를 한 번도 얻지 못했다.

# 2. 영화 [행복한 사전] 속 사랑의 정의

4월의 어느 맑은 날 오후 드물게 반휴를 얻은 나는 지인과 함께 종로의 한 극장에서 [행복한 사전]이라는 영화를 봤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국내에 개봉한 지 두 달 가까이 지난 영화였다.

출판사 겐부쇼보(玄武書房)의 사전편집부가 어떻게 ‘대도해(大渡海) 사전’을 편찬해내는가, 그리고 그 편집자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영화다. 거대한 말의 바다를 건너는 배 같은 사전이라는 ‘대도해 사전’의 뜻을 고려해 ‘배를 엮다(舟お編む)’라는 원어 제목을 살렸으면 좋았겠지만.

이와나미쇼텐(岩波書店) 출판사를 모델로 한 듯한 작품 속 겐부쇼보의 사전편집팀 사람들은 말에 관심이 많다. 가령 ‘오른쪽’이라는 말을 어떻게 새기는 것이 개성적이면서도 정확한 풀이가 되는지를 고민한다.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마지메는 첫눈에 반한 여인인 가구야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도 단어를 모으는 용례채집카드에 기록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마지메가 용례채집카드에 정리한 가구야에 대한 정보 (영화 '행복한 사전' 캡처)
마지메가 용례채집카드에 정리한 가구야에 대한 정보 (영화 ‘행복한 사전’ 캡처)

그래, 영화를 보다가 갑자기 표준국어대사전이 떠오른 것은 바로 마지메와 가구야의 사랑 때문이다.

영화에서 마지메는 가구야와 처음 만난 다음 날 일도 제대로 못 하고 쓰러져 있을 정도로 빈사 상태에 빠진다. 이 모습을 보고 사전 감수자인 마쓰모토 선생은 ‘사랑(恋)’ 항목을 마지메가 작성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의견을 내놓는다.

소설에서는 이 장면이 조금 다르게, 하지만 좀 더 자세히 그려진다. 마지메는 멍하니 ‘신명해국어사전’의 ‘연애’ 항목을 보고 있다. 이 사전은 연애라는 말을 “특정 이성에게 특별한 애정을 느껴 고양된 기분으로 둘이서만 함께 있고 싶고, 정신적인 일체감을 나누고 싶어 하며, 가능하다면 육체적인 일체감도 얻길 바라면서, 이루어지지 않아 안타까워하거나 드물게는 이루어져서 환희하는 상태에 있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마지메는 이런 풀이가 타당한지 의문을 품는다.

“확실히 개성 있는 뜻풀이이긴 합니다만, 연애 대상을 ‘특정 이성’으로 한정하는 것이 타당할까요?”

니시오카는 마지메에게서 팔을 떼고 의자째 자기 책상으로 돌아갔다.

“……마지메, 혹시 그런 사람?”

그런, 이라니. 어떤 걸 가리키는 건가.

니시오카의 말을 흘려들으면서 마지메는 펼쳐 놓은 몇 종류의 사전을 조사했다. 모든 사전이 ‘연애’ 항목에 펼쳐져 있지만, 하나같이 남녀 사이의 감정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현실을 감안하건대 이들 기술에는 정확함이 결여되어 있다.

‘연애’ 용례채집카드에 ‘사전에 반드시 실어야 할 중요도 높은 단어’를 의미하는 이중 동그라미를 쳤다. 비고란에는 ‘남녀만으로 괜찮은가? 외국어 사전도 조사해 볼 것’이라고 기입했다. (54-55쪽)

그리고 마지메의 이런 의문은 소설 말미에 가서, 소설 속 시간으로 15년이 지난 시점에서야 풀리게 된다. 신임 사전편집자인 기시베는 마지메에게 ‘사랑(愛)’ 항목의 뜻풀이가 이상하다는 의견을 피력한다.

기시베는 의기양양하게 가슴을 쳤다. “더 이상한 것은 ‘사랑’에 관해 설명한 2번의 뜻풀이입니다. ‘② 이성을 사모하는 마음. 성욕을 동반할 때도 있다. 연애’라고 돼 있어요.”

“이상한가요?”

마지메는 완전히 자신을 잃은 모습으로 기시베의 안색을 살폈다.

“어째서 이성에 한정하냐고요. 그럼 동성애 사람들이 때로 성욕도 동반하여 상대를 그리워하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은 사랑이 아니란 건가요?”

“아뇨, 그렇게 말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거기까지 꼼꼼히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기시베는 마지메의 말을 가로막고 단정했다.

“마지메 씨. 《대도해》는 새로운 시대의 사전이지 않아요? 다수파의 비위를 맞추고 고루한 생각과 감각에 얽매인 채, 날마다 변해가는 말을, 변해가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말의 근본 의미를 정말로 뜻풀이할 수 있으세요?”

“지당한 말입니다.”

마지메의 어깨가 축 처졌다.

“예전에 ‘연애’ 뜻풀이에 관해 기시베 씨와 같은 의문을 가진 적이 있습니다. 그랬던 내가 그날그날 작업에 쫓겨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네요. 면목 없을 따름입니다.” (253~254쪽)

그리고 결국 ‘사랑’ 항목의 “이성”은 “타인”으로 고쳐졌다.

사랑(こい〔恋〕) 어떤 사람을 좋아하게 되어 자나깨나 그 사람 생각이 떠나지 않고 다른 일이 손에 잡히지 않게 되며 몸부림치고 싶어지는 마음의 상태. 이루어지게 되면 하늘에라도 오를 듯한 기분이 된다. (영화 '행복한 사전' 캡처)
사랑(こい〔恋〕) 어떤 사람을 좋아하게 되어 자나 깨나 그 사람 생각이 떠나지 않고 다른 일이 손에 잡히지 않게 되며 몸부림치고 싶어지는 마음의 상태. 이루어지게 되면 하늘에라도 오를 듯한 기분이 된다. (영화 ‘행복한 사전’ 캡처)

# 3. 다시 현실 속 ‘사랑’의 정의

몇 주 전 대학 시절을 함께 보낸 형이 표준국어대사전의 ‘사랑’ 항목이 바뀌었다고 연락을 해왔다.

원래 표준국어대사전은 사랑을 “이성의 상대에게 끌려 열렬히 좋아하는 마음. 또는 그 마음의 상태”라고 정의했다.

그러다 지난해 경희대 학생 5명이 국민신문고를 통해 기존의 풀이가 이성애 중심적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성적 소수자까지 포괄할 수 있는 정의를 제안하면서 “어떤 상대의 매력에 끌려 그리워하거나 좋아하는 마음”이라고 새겨지게 됐다. 연애, 연인, 애인, 애정 등도 동성애 등을 배제하는 풀이에서 끌어안는 풀이로 바뀌었다.

그 형이 알려준 것은, 이렇게 바뀐 낱말 일부가 언젠가부터 이성애 중심적인 새김말로 도로 바뀌었다는 소식이었다. 당장 국립국어원 홈페이지의 표준국어대사전을 검색해보니 사실이었다. 위에서 언급했던 낱말 다섯 개 중에서 ‘연인’과 ‘애인’을 뺀 나머지 셋이 이성애 중심적인 새김말로 환원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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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국어대사전을 내는 국립국어원도 현실적으로 국가기관이고, 국어원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기본적으로 공무원인 이상 국민신문고를 통해 받은 의견을 반영했다가 철회하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면 어디선가 동성애를 포괄하는 뜻풀이에 반대하며 항의했다는 얘기가 된다.

아니나다를까 국민일보 기사를 찾아보니 개신교단체를 포함한 일부 시민단체에서 국립국어원에 여러 차례 항의를 했다고 한다. 국어원에서 일한 적이 있는 다른 지인에게 들은 바로는 국어원 앞에서 줄기차게 1인 시위도 했단다.

이런 사실을 모아 내가 회사 내 문화부 담당 선배에게 제보를 했고, 결국 지난 3월 31일 기사가 송고되면서 한창 화제가 됐다.

# 4. 왜 너희는 사랑이고 그들은 사랑이 아닌 거지?

국립국어원의 의사결정자들은, 그리고 국립국어원에 항의했던 개신교도들은 누군가와 사랑해 본 적이 있을까, 없을까. 어쩌면 그들은 사랑보다는 증오와 더 친하고, 끌어안기보다는 배제하기를 더 좋아하는 사람인 것 같다. 만약 그렇다면 그들은 ‘사랑’이라는 말을 풀이하는 데 왈가왈부할 자격이 없다. 누군가와 사랑하는 사람만이 사랑이라는 말을 풀이할 수 있는 법이다.

대도해 사전의 감수자인 마쓰모토 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말로는 알고 있어도, 실제로 삼각관계에 빠져 보지 않고는 그 쓴맛도 괴로움도 충분히 자신의 것이 되지 않습니다. 자신의 것이 되지 않은 말을 바르게 뜻풀이할 수 없겠죠. 사전 만들기를 하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실천과 사고(思考)의 지치지 않는 반복입니다.”(72쪽)

영화에서는 같은 사람이 이렇게도 말한다:

“단어의 바다는 끝없이 넓지요. 사전은 그 너른 바다에 떠 있는 한 척의 배. 인간은 사전이라는 배로 바다를 건너고 자신의 마음을 적확히 표현해줄 말을 찾습니다. 그것은 유일한 단어를 발견하는 기적. 누군가와 연결되길 바라며 광대한 바다를 건너려는 사람들에게 바치는 사전. 그것이 바로 대도해입니다.”

사랑의 정의에 ‘이성’이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말의 바다를 건너고 있는 것일까. 나는 여기서 동성애가 옳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동성애가 그르다고 말하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동성애가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 가치판단을 사전이 할 필요도 없으며 해서도 안 된다고 말하려는 것이다. 사전은 좀 더 많은 사람을 끌어안을 수 있는 뜻풀이를 하면 그뿐이다.

다만 만약 동성애가 사랑이 아니라면, 개신교도들이 그토록 죄악시하는 동성애라는 개념 자체가 사라지게 되고 결국 개신교도들은 ‘동성애’라는 죄목으로 아무도 단죄할 수 없게 될 것이라는 점은 기억해줬으면 좋겠다.

참고로 세계적 권위를 인정받는 옥스퍼드 영어사전(OED)과 프티로베르(Petit Robert) 불어사전에서 사랑(love, amour)을 찾으면 이런 풀이말이 나온다. 각각 낭만적 사랑에 해당하는 새김만 발췌했지만, 어디에도 ‘이성’이나 ‘남녀’, ‘다른 성’이라는 말은 없다.

love n.
4. a.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느끼는 매력에 기반을 둔 로맨틱한 애착의 강렬한 감정; 다른 사람에 대한 강한 호감과 관심, 일반적으로 성적인 열정과 결합돼 있다.
An intense feeling of romantic attachment based on an attraction felt by one person for another; intense liking and concern for another person, typically combined with sexual passion. (OED Online, 유료)

amour n. m.
3. 어떤 사람을 향한 호의로, 대체로 열정적인 특성이 있으며, 성적 본능에 기반해 다양한 행동을 유발한다.
Inclination envers une personne, le plus souvent à caractère passionnel, fondée sur l’instict sexuel mais entraînant des comportements variés. (Petit Robert, 2003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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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댓글

  1. 좋은 책과 영화 소개도 감사하고, 사랑에 대한 필자님의 정의에도 동감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네요. 말의 중요성을 국립국어원에 항의한 개신교도들은 잘 알고 있는 것이네요.

    우리도 국립국어원에 항의를 해야 할까요?

  2. 왜, 우리가 사전의 권위에 굴복해야 할 까요? 그건 하나의 의견에 불가한 것 아닌가요? 이런 논의 자체가 우리의 후진성을 방증합니다. 후진국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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