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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개소식을 하고 화려한 출발을 한 스타트업 얼라이언스(Startup Alliance). 미래창조과학부와 네이버 등이 주도해서 만든 기구로 한국 대표 인터넷 회사들과 VC, 인큐베이팅 기관 등 47개가 모인 연합체이다. 창업 초기 인터넷 기업을 위한 생태계 구축을 표방하며 특히 한국 기업의 글로벌 진출을 돕는 것이 주요 목표라고 한다. 이름만으로도 거창한 기구의 개소식에는 미래부 차관을 비롯해 ‘벤처’, ‘스타트업’을 대표하는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모두 모였다.

스타트업 얼라이언스 로고

이 수많은 사람을 움직이게 한 중심에는 스타트업 얼라이언스 임정욱 센터장이 있다. 1994년,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후 20여 년 만에 그는 정보와 네트워크의 중심에 서게 됐다. 조선일보 기자 출신이지만, ‘조선일보’라는 꼬리표를 떼고도 그에 못지않은 영향력을 갖추고 있다.

스타트업을 위한 생태계를 만들고 특히 한국 스타트업의 글로벌 진출을 돕는다는 게 너무나 매력적이어서 반갑게 센터장 제안을 받아 들였습니다. 제가 실리콘 밸리에 있을 때도 한국의 스타트업들로부터 많은 문의가 왔었는데, 내가 꼭 도와줄 의무는 없었지만, 마음이 움직여 열심히 도왔던 기억이 있거든요. 그렇다면, 본격적인 ‘일’로 해도 나쁘지 않겠다 생각했어요.

그랬다. ‘스타트업 얼라이언스 센터장’이라는 직함이 있기 전에도 그는 늘 새로운 정보와 트렌드를 정리하고 전달하는 일을 지속해왔다. 영향력 있는 1인 미디어로 자리 잡은 그는 정보를 전하는 채널도 다양하다. 시사인, 조선일보, 한겨레 등 전통 미디어에 칼럼을 게재할 뿐 아니라 개인 블로그 ‘에스티마의 인터넷 이야기’도 상당한 고정 팬을 확보하고 있고 2천 명이 넘는 페이스북 친구, 8만 명이 넘는 트위터 팔로워가 있다. 그래서 그의 한마디가 때로는 과한 ‘반응’을 보이는 게 부담스러울 정도이다.

온/오프라인, 국내/글로벌, 다양한 미디어를 경험하다

임정욱 센터장은 ‘미디어’의 구석구석을 경험했다. 종이신문, 인터넷 신문, 포탈 – 그것도 국내 및 글로벌 서비스까지 모두 두루 걸쳤다. 호기심 많은 그는 늘 주변을 두리번거렸고 새로운 것에 귀 기울이는 편이었지만 그의 커리어는 의도적이었다기 보다는 재미있는 우연이 겹치기도 했고 운이 좋았던 적도 있었고 상황이 어려웠던 적도 있었다. 누구나 다 그렇듯이 말이다. 인생의 파고를 넘으며 그가 놓치지 않고 잡았던 것은 ‘IT/인터넷’이라는 서핑보드였다.

94년, 신문사 입사를 위해서는 ‘언론 고시’라는 입사 시험을 통과해야 했지만, 그 해 조선일보는 인턴기자를 뽑으면서 상식 중심의 필기시험을 토익으로 대체 했다. 그에게 상당히 ‘유리한’ 조건이었다. 논술 시험에는 여자 친구의 학교 숙제를 도와주느라 공부를 했던 ‘북한 핵 문제’가 나왔다. 그렇게 어렵지 않게 조선일보에 입사했다. 입사할 때부터 경제과학부에서 IT 섹션을 담당하는 게 꿈이었지만, 현실은 수습 끝나는 날 삼풍사건이 터져 특별 취재팀에 소속됐고 영등포 경찰서 출입을 하는 사회부 기자를 거쳐야 했다.

‘언젠가는……’이라는 생각으로 지내고 있는데, 몇 달 후 경제과학부 IT팀의 ‘집단 퇴사’로 원하던 곳으로 자리를 옮길 수 있었다. (그 당시 ‘집단 퇴사’했던 사람 중 하나가 나였으니 임 센터장과는 참 재미있는 인연이다). 이때 조선일보는 한창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 가자’는 기치를 들고 ‘디지털’에 많은 관심을 보일 때였다. 당연히 IT 기자에게 다양한 기회와 경험이 주어졌다.

그러다가 몇 년 후 IMF 사태를 맞았고 사회 전반적으로 거대한 변화의 물결과 함께 그도 ‘미래에 대한 대비’를 생각하게 됐다.

결혼도 하고 보직도 바뀌면서 막연하게 좀 큰물에서 놀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우연히 정통부에서 기획한 ‘실리콘 밸리 연수 프로그램’에 참여해서 2주간 스탠퍼드 대학에서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세계 IT 산업의 심장부에서 일하는 것은 어떤 느낌일지, 경험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나 봅니다.

휴직, 유학, 운영, 경영

99년 그는 회사를 휴직하고 유학을 준비했다. 겸손한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운이 따라서’ 실리콘 밸리에서 멀지 않은 버클리 하스 스쿨(Haas School of Business)에서 MBA 과정을 공부할 수 있었다. 공부하는 동안 세계 경제 여건 (특히 미국)은 그리 좋지 못했다. 닷컴 버블이 무너지고 911 사태로 월드 트레이드 센터도 무너지는 초유의 사태도 겪었다. 미국에 있는 외국 유학생들이 현지에서 자리를 구하기란,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가 되었다.

공부를 마치고 다시 돌아와 이번에는 인터넷 뉴스의 운영과 경영에 참여하게 됐다. 특히 재미있는 경험은 조선일보 일본어판을 발행하는 자회사의 사장으로 컨텐츠에서부터 광고까지 전체를 총괄하는 일도 담당했다.

그때 드라마 ‘겨울연가’가 일본에서 한창 인기를 끌면서 ‘욘사마 열풍’의 덕을 봤습니다. 관련 기사가 실리는 날이면 야후 재팬 (일본에서 영향력 1위의 포탈) 톱 페이지에 오르곤 했었죠.

게다가 당시만 해도 인터넷 언론에서는 별로 시도 하지 않았던 구글의 광고 플랫폼 ‘애드센스’를 사이트에 달아 조회수 뿐 아니라 매출도 일으켰다. 애드센스를 달고 첫 달 수입이 2만 달러 (약 2천만 원 정도)를 기록했으니 나쁘지 않은 성과였다.

신문, 인터넷 신문에 이은 다음 행보는 포탈이었다. 2006년 다음커뮤니케이션즈로 옮겼다. 다음에서 했던 일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두 가지는 ‘날리지 오피서'(Knowledge Officer; 지식경영자)로 일한 것과 라이코스 CEO로 일했던 것이다.

‘날리지 오피서’라는 생소한 직함은 다음의 미래 먹거리를 찾는 일이었다. 업무 정의도 모호하고 범위도 폭넓은 일이었지만 발 빠르게 세상의 흐름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점이 좋았다. 그는 다시 기자 시절처럼 컨퍼런스도 참석하고 기술 및 비즈니스 트렌드를 게시판에 올리는 일에 노력을 기울였다. 가능한 대로 사내 강의 기회도 만들어 자신이 알게 된 것을 나누는 일에 주력했다.

새로운 도전, 미국 현지의 CEO가 되다

다음커뮤니케이션즈가 글로벌 인터넷 서비스인 라이코스를 인수하면서 미국 현지의 CEO로 일했던 시간은 그에게는 또 다른 도전이자 새롭고도 값진 경험이었다. 2009년 2월 보스턴으로 건너가 더 큰 시장의 물살도 느끼고 다른 문화와의 충돌도 겪었다.

미국에서의 유학 생활과 글로벌 기업의 CEO로서의 역할은 전혀 다른 차원의 경험이었죠. 훨씬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세계 경제의 흐름을 가까이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미국 사람들의 일하는 문화’를 경험했다는 것은 정말로 값진 소득이었죠.

다음 스토리볼 - 한국 vs 미국 직장 1mm 차이
다음 스토리볼 – 한국 vs 미국 직장 1mm 차이

인터넷이 발전한 시대이니 지식과 정보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구할 수 있지만 ‘문화’의 경험은 몸으로 부대껴야 체득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그는 그 때의 경험을 다음 스토리볼에 ‘한국 vs 미국직장 1mm 차이’라는 이름으로 연재해 큰 관심을 끌기도 했다.)

임정욱 센터장이 트위터에 맛을 들인 것도 이때였다. 아무래도 한국에서 떨어져 있으니 외롭기도 했고, 미국에서 먼저 접하는 신기한 것들을 한국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욕심도 생겨나 열심히 정보를 전하는 역할을 했던 것. 그는 우리나라의 트위터가 유행한 초창기부터 팔로워 군단을 거느린 ‘파워 트위터리안’으로 잘 알려졌다.

이제 한국의 스타트업들과 함께

2012년 라이코스에서의 임무를 마치고 실리콘 밸리에 위치한 다음 글로벌 서비스 본부로 본거지를 옮겼다. 좀 더 본격적으로 스타트업을 만나고 그 생태계와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임정욱

이제 오랜 ‘미쿡 생활’을 마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지 5개월째, 이곳에서 다시 험난한 항해를 시작하는 그의 표정은 편안해 보였다. ‘산전수전공중전’을 모두 거쳐 스스로 ‘1인 미디어’로의 영향력을 굳건히 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한국의 스타트업과 발을 묶고 2인3각으로 영차, 영차 발맞춰 글로벌 시장으로 뛰어 나가는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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