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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슬로우뉴스를 즐겨 읽는다. 며칠 전 [사진 노트 9: 다가가는 것과 물러서서 조망하는 것]을 읽다가 한 장의 사진이 눈에 들어 왔다. 베트남 전쟁 당시 북베트남에서 군사훈련을 받는 어린 소녀의 사진이었다.

한 장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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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리부, 북베트남(1969)

프랑스 출신 작가 마크 리부(Marc Riboud)가 북베트남에서 찍은 사진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달려 있었다.

어린 소녀까지도 나라를 지키는 데 동원/참여하는 북베트남의 현실은, 당시 냉전상황에서는 하늘을 날아가서 훔쳐보지 않는 이상 볼 수 없는 장면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새롭고, 유일하며, 넓은 시야를 제공합니다. (서울비)

이 설명을 보는 순간 좀 복잡한 생각을 하게 된다.

“어린 소녀까지도 나라를 지키는 데 동원/참여하는 북베트남의 현실”, 그 현실을 담은 사진의 눈길은 매우 ‘객관적 거리’에 충실하다. 소녀의 앳된 얼굴과 굳은 표정 무거워 보이는 소총. 이른바 인류 공통의 보편적 인권이라는 잣대로 본다면 이는 분명 아동과 청소년에 대한 가혹행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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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리부, ‘북베트남'(1969)의 부분 사진

몇 살이나 되었을까? 1989년 국제 연합 총회에서 채택되어 1990년 발효된 아동의 권리에 관한 협약은 15세 이하의 어린이에 대한 징병을 금지하고, 부득이한 경우라 할지라도 18세 미만의 어린이에 대해서도 가능한 최연장자를 우선으로 징병하여야 하며, 전쟁 시 어린이에 대한 보호를 최우선으로 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제38조).

오늘날  ‘소년병’은 보호받지 못한 인권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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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이라크 전쟁 당시의 소년병 (위키미디어 공용, CC BY-SA 3.0)

그러나, 바로 그 당시 이들의 머리 위로 매일 같이 미국의 폭격기가 폭탄을 문자 그대로 쏟아 부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 어린 소녀에게 총이라도 쥐여주는 게 그나마 더 인간적인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물론 전쟁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어린이들에게 전해 주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인권 수호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알 수 없는 이유로 폭탄이 하늘에서 이 어린이의 머리 위로 무수히 떨어질 때, 할 수 있는 일이란 과연 무엇이 있을까?

폭격에 대해

1937년 4월 26일 스페인 내전 당시 나치독일은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에 있는 작은 도시 게르니카에 융단폭격을 퍼부었다.  이 소식을 들은 피카소는 폭격의 잔혹함을 고발한 그림을 그렸다. 피카소의 게르니카에는 폭격이 몰고 온 아비규환과 공포가 절절히 배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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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바스크 지방 게르니카에 설치된 타일.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모사하였다.(위키미디어 공용, 스페인 공공미술 저작권 법에 의한 퍼블릭도메인)

그 이후로도 이른바 ‘총력전’의 상황에서 융단폭격 전술은 적국의 기반시설을 괴멸시키려는 목적으로 약방의 감초처럼 쓰여왔다. 그리고 전쟁에서 융단폭격을 가장 많이, 그리고 가장 철저히 구사하여 온 나라는 미국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은 독일의 주요 도시를 폭격하였다. 폭탄으로 카페트를 깔듯이 쓸어버린다는 의미에서 융단 폭격이라 불린 미국의 폭격 전술은 마치 도시를 지도에서 지워버리기 위한 것처럼 보였다. 독일 작센의 유서 깊은 주도 드레스덴은 폭격으로 도시의 90%가 폐허로 변했다.

폭격기가 날라와 폭탄을 떨어뜨리면 밑에 있는 사람들은 그저 죽을 수밖에 없다. 미국의 진보적 학자 하워드 진은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에서 자신이 2차대전 중에 폭격에 가담하였던 경험을 이렇게 설명한다.

“항공대에 소속되어 3만 5천 피트 상공에서 폭탄을 투하한다는 건 어느 누구도 보지 못한다는 것, 비명소리도 듣지 못하고, 피도 보지 못하고, 토막 난 시체도 보지 못한다는 겁니다. 어떻게 현대의 전쟁에서, 원거리에서 잔학행위가 자행되는지, 저는 잘 압니다. 제가 그때 바로 그런 일을 했습니다.”

전쟁이 있는 곳에 폭격이 있었다. 한국전쟁에서 북한, 특히 평양에 대한 융단폭격을 감행한 미공군사령관은 평양을 석기시대로 돌려보냈다고 자랑하였다. 도시가 석기시대로 돌아가면서 함께 묻혀버린 아이들은 과연 얼마나 될까? 알 수 없다.

단지 적국의 국민이라는 것이 죽어야만 할 이유가 될까? 폭격은 그렇다고 대답한다. 공장을 파괴하고 발전소를 파괴하고 다리를 파괴하고 적의 지휘부를 파괴하기 위해 폭탄은 떨어지고 그 밑에 있는 사람은 죽어야 한다. 그것은 단지 부수적인 피해일 뿐이다. 폭격은 기계적으로 자행되는 학살이다.

베트남전쟁 당시 미군이 떨어뜨린 폭탄은 모두 700만 톤으로 당시 베트남 인구를 고려하면 한 사람 앞에 0.25 톤의 폭탄이 떨어진 셈이다(조엘 안드레아스, 전쟁중독). 물론 폭탄에는 눈이 없으니 그 밑에 있는 것이 사람인지 집인지도 가리지 않으며 더욱이 아이와 어른은 나누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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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1월 14일 북베트남을 폭격 중인 미 공군. B-66 폭격기의 지휘 아래 폭탄을 투하하는 F-105 전투기(위키미디어 공용, CC BY-SA 3.0)

적국의 기반시설을 괴멸시킨다는 점에서 융단폭격의 전략적 가치는 높게 평가받아 왔지만, 정작 베트남 전쟁에선 그 빛을 잃었는데, 무언가 기반 시설이라고 불릴만한 것 자체가 그다지 없는 저개발 국가에는 그럴듯한 폭격 목표물이 없었고, 따라서 폭격의 효과도 적을 수밖에 없었다.

재작년 하롱만에 놀러 가서 그 수 많은 섬들 사이를 구경 다니다가 들은 이야기인데 싣고간 폭탄을 다 쏟아 붇지 못한 폭격기들은 하롱만 앞의 섬들에다 폭탄을 떨구기 일쑤였다고 한다. 그 덕에 숨겨져 있던 파식 동굴이 드러나서 멋들어진 관광자원이 되었다지만, 결국 폭탄을 쏟아 붇다가 붇다가 남길 정도로 폭격했지만 북베트남의 전력 약화에 그리 효과적이진 못하였다. 그저 그 밑에 있는 사람들만이 희생되어 갔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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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폭격기가 남은 폭탄을 ‘처리’하기 위해 하롱만 앞 섬에 폭탄을 떨어뜨려 섬 안의 파식 동굴이 드러났다. 지금은 베트남 정부에서 원숭이를 풀어 놓고 관광자원으로 삼고 있다. (2012년 9월 베트남 하롱만에서 찍음, john jin)

전쟁과 학살

전쟁이 없는 사회를 열망하지만, 불행히도 누군가에 의해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그 전쟁이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하는 강대국과 식민지를 막 벗어난 저개발 국가 사이에 일어난 것이라면 그 참담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미국과 베트남 사이에 있었던 전쟁이 바로 그렇다.

호찌민은 어떻게든 미국을 자극하려 하지 않았지만(주1), 미국은 결국 통킹만 사건(주2)을 조작하여 전쟁을 일으켰다. 전쟁이 일어난 뒤엔 그것이 참여가 되었든 동원이 되었든 베트남 사람들은 한 자루 소총을 들고 기계화된 최강의 군대와 싸울 수밖에 없었다.

미라이 학살이나 빈호아 학살과 같이 눈앞에서 사람을 학살한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폭격과 파괴 그 전체가 학살이다. 폭격이라는 유례없는 학살 앞에 고작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방공호 안에서 공포에 떨며 무사하기를 빌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

어린 소녀의 손에 쥐어진 무거운 소총과 너무나도 앳되어 안쓰러운 얼굴에 나타난 굳은 표정이 함께 담긴 사진. 아동의 전쟁 ‘동원’을 이야기할 때엔, 저울추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그 뒤에 놓인 전쟁과 학살, 무자비한 폭격도 함께 생각해야 한다.

베트남 전쟁 당시 투입된 북베트남군 소년병의 사망률은 90%에 육박한다. 대부분 호찌민 루트를 따라 남하하는 과정에서 폭격으로 죽었다고 한다. 저 사진 속 소녀는 부디 살아남아 지금도 어디선가 살고 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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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호찌민은 2차대전 당시 일본에 맞서 우리의 광복군처럼 미군(OSS)과 함께 작전을 수행하였다. 일본이 정식으로 항복한 1945년 9월 2일, 호찌민은 베트남 민주공화국을 선포하였다.(마치 여운형이 건국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한 것처럼 – 베트남의 역사는 여러모로 우리 역사와 닮은 점이 많다.) 하노이 바딘 광장에서 열린 독립선포식엔 미군이 특별히 귀빈 자격으로 초대되었고,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헌법 제1조는 미국 헌법을 그대로 옮겨온 것이었다. 호찌민은 이후로도 미국에 베트남을 승인해 달라고 당부하는 편지를 지속해서 보냈지만, 미국은 프랑스가 다시 식민 통치를 하고자 하는 것을 묵인하고, 지원하였다.
    (원문으로)
  1. 1964년 8월 2일, 미 해군은 통킹만에서 두 차례에 걸쳐 북베트남의 어뢰정 공격을 받았다고 발표하였다. 미국은 이 일을 베트남전에 직접 개입할 명분으로 삼았다. 하지만 전쟁 후 통킹만 사건은 조작이었음이 들어났다. 첫 번째 교전은 미해군의 선제 공격에 의한 것이었고, 두 번째 공격은 있지도 않았다.(원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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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댓글

  1. 음 그냥 사족으로 아는체를 좀하면요, 북폭사진에 설명이 조금 틀려요, B-66은 배트남 기간동안 폭격기로 사용된 적이없고요(1962년 폭격기 부대에서 퇴역 이후 전자전기로 개조된 기체만 베트남전에서 미군이 철수하는 1973년까지 사용되었습니다), 폭탄이 떨어지는 모양을 봐도 그렇고, F-105기가 폭격을 하고 B-66(EB-66B)은 폭격유도나 전자전지원을 하고 있는것을 보입니다.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Bombing_in_Vietnam.jpg 에도 F-105가 폭탄 투하로 나오고요

  2. 가브리에 오보에로 유명한 영화 미션(The Mission)의 마지막 장면에서 나쁜 놈들이 총들고 쳐들어오는데 거기서 총을 들고 싸우다 죽는 것과, 십자가 들고 죽어가는 것 중 어느 것이 최선인가로 싸운 적이 기억나네여..
    비슷하게 3.1운동을 두고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의 시위란 찬사가 맞느냐 약한 자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저항이란 수식이 맞느냐,… 또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시위에서 시위대가 청와대까지 가서 끝을 봐야하느냐 아니면 광장에서 외치다 해산하느냐의 그런 논쟁이 이 글을 읽다보니 떠오릅니다.
    전 소녀에게 총을 쥐어주는것이 최선이라는 것에 한 표 던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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