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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x type=”note” ] 널리 알려진 사람과 사건, 그 유명세에 가려 우리가 놓쳤던 그림자,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이상헌 박사‘제네바에서 온 편지’에 담아 봅니다.

마르크스 경제학으로 유명한 김수행 교수는 필자인 이상헌 박사의 은사입니다. 은사를 향한 존경과 감사를 담은 이 글은 김수행 교수의 칠순기념논문집(2012)에 실렸습니다. (편집자)[/box]

벌써 칠순이시다. 늘 화사하게 웃으시는 얼굴에도 이제 세월이 묻어난다. 그 세월이 서럽지 않고 포근해서 다행이다. 여름날 나무 그늘 같다. 학생들은 더러 “테니스밖에 모르는 뚱땡이 할아버지”라 놀리며 친밀함을 내비친다. 얼마 전 성공회대에서 잠시 뵈었다. 내 아들과 나를 단골 식당으로 이끌고 가시던 모습은 평화로웠다. 어릴 적 내 손을 끌고 논두렁을 지나 구멍가게에서 알사탕 사다가 기어코 내 입에 넣어주시던 외할아버지 같았다. 칠순의 선생님은 여전히 아름다우시다.

나무

자청해서 쓰는 글이다. 선생님이 배출하신 수많은 기라성같은 제자들 중에서 나는 명함도 못 내밀 졸병쯤 된다. 선생님이 천신만고 끝에 서울대로 오셨던 1989년에, 나는 학부 4학년생으로 가끔 시위에 참여하고 모임에서 몇 마디 거드는 것 외에는 별 한 일이 없었다. 선생님을 모셔오는데 별다른 기여는 하지 않았으면서도, 선생님으로부터 온갖 수혜를 받은 밉상 학생이었다.

자격 미달에 짬밥도 안 되는 내가 이 글을 쓰겠다고 나선 까닭은 지극히 개인적이다. 선생님께 진 빚이 많기 때문이다. 그 빚을 갚을 방법이 달리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기에 쓴다. 논문집에 어울리지 않게 넋두리 같은 말랑말한 글이니, 이해해 주길 바란다.

선생님이 서울대 교수가 되신 것이 만 46세 때쯤이었다. 얼추 지금 내 나이다. 많은 나이는 아니겠으나, 적은 나이도 아니다. 별로 한 것도 없는 나는 벌써 힘들어한다. 요령도 부리고 폼 잡은 일이 잦아진다. 선생님은 그 나이까지 버티셨고, 그때부터 학문적 성취를 눈부시게 이루셨다. 과연  ‘인생은 속력이 아니라 방향’이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질주만 해댄 이 인생의 아둔함을 타박하며, 선생님과 얽힌 얘기를 몇 가지 할까 한다.

풍향 방향 나침반

조금 뜬금없이 들리겠지만, 나와 나의 아내는 초등학교에서 만났다. 연애가 길어지다 보니 결혼도 빨랐다. 선생님께서 먼 길을 마다하시지 않고 주례를 봐 주셨다. 부산 광안리 근처에 있는 한정식집에서 저녁 식사 대접하는 것으로 주례비를 대신했다. 식장에서 선생님은  신랑과 신부가 어릴 때부터 “까졌다”고 한바탕 훈계하셨다. 옳은 말씀이라 새겨 들었다. 이른 결혼이다 보니, 박사과정에 들어가자마자 첫아기를 보게 되었다. 딸이었다. 그런데 딸에게 심각한 건강 문제가 있다 했고, 당시 의사들은 호전될 것으로 기대하지 않는 눈치였다. 하늘이 무너지는 심경에 넋을 잃고, 인생에 욕지거리해댈 때였다.

선생님은 유학을 권하셨다. 외국 나가서 방법을 찾아보라는 말씀이셨다. 하는 데까지 해보아야 나중에 후회가 없다 하셨다. 미국은 의료보험 때문에 불가능했고, 선생님이 평소 부러워하시는 국민의료체계(NHS)가 있는 영국으로 방향을 틀었다. 부랴부랴 정한 일이기에, 준비할 틈도 적었다. 영어는 짧았고 박사논문 주제는 희미했다. 논문 프로포잘과 입학 원서 작성이 당장 발등의 불이었고, 어느 대학을 가야 할지도 몰랐다.

참으로 부끄럽고도 고마운 얘기지만, 이 모든 걸 선생님이 팔 걷고 나서서 해주셨다. 말도 안 되는 영문 한 페이지짜리 초안을 서너 페이지 멋진 프로포잘로 만들어주셨고, 원서도 꼼꼼히 챙기셨다. 영국 문화원에 ‘협박’ 전화를 하셔서 장학금도 알아봐 주셨고, 케임브리지 대학에 있는 장하준 교수에게도 전화해서 도움을 청하셨다. 물론 추천서도 써주셨다. 상황이 상황이었던지라, 당신께서는 임팩트 있는 추천서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셨던 것 같다. 그 정도가 지나쳐 결국 “이 친구는 장하준 교수보다 낫소”하는 추천서를 보내셨다. 속된 말로 대형사고를 쳤다. 선생님의 ‘오버’ 덕분에, 나는 케임브리지로 유학 갈 수 있다.

거기서 우리는 큰 선물을 얻었다. 한국에서 들었던 천형 같던 진단들은 모두 오진이고, 우리 딸은 지극히 정상이라는 것. 인생은 이렇게 드라마틱하다고 흥분했었다. 그러곤, 영어로 박사논문을 써야 한다는 엄숙한 현실을 마주하게 되었다. 돌이켜 보면, 코미디 같은 일이다.

선물

내가 그렇게 딸을 얻었을 바로 그 시기에, 선생님은 아들을 잃으셨다. 당신이 70년대라는 엄혹한 시기에 마르크스 경제학이라는 무시무시한 ‘괴물’을 공부하면서 혹 가족에 어려움이 있을 것을 염려해서, 런던에 꼭꼭 묶어 두었던 세 아들 중 막내였다. 사랑하는 아들을 지키려고 부러 내치면서 키운 아비가 그때 느꼈을 회한. 그저 짐작만 할 뿐이다.

그 와중에 선생님은 내 원서를 고치고, 프로포잘을 만들고 전화를 해 주셨다. 선생님의 전매특허인 “야, 이 친구야”로 시작되는 꾸중 한마디 없으셨다. 케임브리지에서 입학 허가를 받았을 때, 선생님은 당신의 또 다른 전매특허인 “축하합니다”라는 말 이외는 달리 말씀이 없으셨다.

그래도 걱정이 되셨는지, 런던에 있는 둘째 아들의 차를 뺏어다가 내게 주셨다. 그렇게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내 가족의 고통만 어루만져 주셨다. 그게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든 일인지, 내가 살아가면서 알게 된다. 그때는 내 슬픔만 커 보였기에 몰랐다.

자동차 키

내 박사논문에는 마르크스가 없다. 참고문헌에 자본론 1권이 곁다리처럼 언급되어 있을 뿐이다. 케인즈 경제학이 탄생한 케임브리지였지만, 케인지안은 찾아 보기 힘들었고, 마르크스적 경향의 연구자들은 일종의 페이스오프(face off)를 해서 경영 계통의 학과나 연구소로 옮겨 갔다. 그들은 “내 맥박과 심장은 변함없이 뛴다”고 항변했다.

나는 마르크스를 연구할 처지가 되질 못 했다. 그럴 용기도 없었다. 마치 신고전파의 효용최대화 방정식처럼, 나는 주어진 예산과 시간 내에서 박사학위라는 효용가치를 실현했을 뿐이다. 그렇게 해서 나온 박사논문이 선생님 마음에 드셨을 리 만무했지만, 선생님은 “축하합니다!”라고 하시면서 기뻐하셨다. 그저 덕담이었을지언정, 나는 많은 위로를 받았다. 그 당시 나는, 선생님과 아내, 그리고 자칭 “내 아내의 오빠”인 양우진 선배에게 축하받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Cambridge 케임브리지 대학

선생님은 참 편안한 분이다. 그래서 선배들이나 우리 또래들이 많이도 괴롭혔다. 잘난 우리들이 바라는 게 또 얼마나 많았던가? 비장한 질문이 넘쳤다. 정확한 연도는 기억나지 않는데, 90년대 중반쯤이었을 것이다. 한국사회경제학회가 매년 여름에 정기적으로 개최하는 학회에 ‘정치경제학’ 연구자들이 몰렸다. 논문 발표도 중요했지만, 술잔이 돌아가는 집담회가 더 흥미로운 때였다. 마르크스 경제학의 위기에 대한 얘기가 오갔다.

그러다가 누군가 선생님께 물었다. 왜 마르크스 경제학을 하시느냐고. 세상도 바뀌고 미래도 생각하느라 머리가 온통 복잡해진 대학원생이 선생님께 ‘구원의 소리’를 구하려 했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예수와 석가가 어리석은 제자를 위해 던지는 벼락같은 얘기, 그런 걸 바랬을 때다. 그때 선생님은 대답하셨다. 좋아서 한다고. 좋아해야 할 수 있다고. 모두 실망하는 눈치였지만, 선생님은 상관하지 않으셨다. 그 후에도 늘 그렇게 대답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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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멋대가리 없는 선생님의 대답을 종종 생각한다. 조금 분칠해서 대답해도 좋을 것을 굳이 건조기를 팽팽 돌려나온 앙상한 천 조각을 내민 까닭에 대해 생각해 보곤 한다. 약간 야들해야 할 순간에 외려 우악스러움을 보이는 경상도 남자의 태생적 한계일까, 의심도 해 보았다. 나는 이제 선생님의 대답을 내 방식대로 이해한다. 선생님은 어릴 적부터 가난과 싸웠다. 대구의 한 강가에서 자갈을 바닥 삼아 세운 학교에서 글을 배웠다. 늘 가난을 실력과 노력으로 정면 돌파했다. 대구상고 시절에도, 서울대 시절에도 그랬다. ‘가난이 없는 공동체’가 평생의 화두였을 것이다.

그 와중에 마르크스를 만나셨다. 물질적 가난보다도 더 위험천만할 수 있는 길을 가려면, 둘러봐야 할 것이 적지 않았으리라. 결단은 외롭다. 그 외로운 결단을 주위에 설득하기도 쉽지 않고, 도움을 청하기도 쉽지 않다. 이럴 때는 어떡해야 하나? 내가 결정하고 내가 책임진다. 다른 이들을 타박하지 않고, 시류에 시달리지 않아야 한다. 그러려면, 내가 오로지 좋아서 하는 수밖에 없는 건 아닐까. 마르크스라는 거대한 화약고를 두려움 없이 인내하며 다루려면, 나의 안쪽만 바라보아야 한다. 좋아해야 한다. 바깥으로 찬란한 광선을 쏟아대는 신념은 종종 이슬비에도 사그라지지 않던가. 작은 일에 늘 흔들리는 나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곤 한다.

loop_oh, CC BY 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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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런 생각을 하곤 한다. 선생님을 서울대로 모신 다음에, 마르크스 경제학의 운명을 선생님에게 오로지 짐 지우지 않았나. 짐을 나누어 지어보려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 수가 적었고, 상황도 그다지 녹록지 않았다. 거대한 소명의식 같은 게 있었는데, 이를 감당하기 어려워 떠나기도 했다. 더러는 마르크스 경제학을 ‘변절한 애인’으로 보고 냉정히 돌아섰다. 이미 떠난 애인이라면 내치기가 훨씬 수월한 법.

그렇다고 이 모든 것이 없어진 것인가? 꼭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아니겠으나 마르크스적 분석은 비마르크스적인 분석 안에 숨어 있다. 레닌식 표현을 빌자면, 나는 현재 직장에서 “노예의 언어”로 말하고 쓴다. 마르크스라는 이름은 사용불가다. 그러나, 그 ‘퇴락한’ 언어에 마르크스적인 분석을 숨겨두려 한다. 억울한 일이긴 하지만, 우리가 구하고자 하는 것은 마르크스 이름이 아니라, 그의 분석과 지향이 아니던가?

최근 경향신문 칼럼을 통해 선생님은 시민사회 운동에서, 대학 등록금 투쟁에서, 무상급식 운동에서, 세상 도처에서 마르크스를 발견하셨다.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사회학자 존 홀로웨이(John Holloway)가 최근 주장한 것처럼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의 맹아는 우리 모두의 일상적 투쟁에 있지 않을까. 이런 방식의 이해와 연대를 통해서,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자본가계급은 이윤을 얻으려는 수고를 면제받으며, 임금노동자계급은 모든 분노를 잊”은 사회의 단초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경향신문, ‘김수행 칼럼: 쇠퇴하는 자본주의’, 2011년 5월 24일). 그런 생각을 한다.

김수행칼럼: 쇠퇴하는 자본주의 중에서 (경향신문)
김수행 칼럼: 쇠퇴하는 자본주의 중에서 (경향신문)

선생님은 둘러가는 법이 없다. 오로지 정공법이시다. 어릴 적 가난과 싸우면서 체득하신 것인지도 모르겠다. 마르크스에 대해서도 항상 정공법만 구사하신다. 그 수많은 후대의 해석자들과 씨름하는 것보다는, 마르크스와 직접 대화한다. 메이나드 케인즈와 아담 스미스에도 예외가 없다.

스미스를 전형적인 시장주의자로 보는 견해를 원전에 기초에서 반박하고, 케인즈를 박애주의적 개입주의자로 보는 견해를 경계하신다. 한국 경제도 바로 자본론의 틀 내에서 분석하신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마르크스주의’가 끼어들 틈이 없다. 마르크스주의는 늘 위기이지만, 마르크스는 죽지 않는다. 그래서 선생님께 ‘주의’는 쓸모없는 일이다. 굳이 ‘주의’라는 딱지를 붙이자면, 원전주의가 아닐까. 여하튼 선생님의 정공법은 난공불락이다.

성격 까칠한 나에게는 존경하는 사람이 드물다. 새벽까지 자습하고, 폭력이 난무하는 고등학교 때 결론을 내렸다. 농담하지 마라. 이 세상에 은사는 없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가짜로 보였던 대학 학부 시절에도 그리 다를 것 없었다. 그러던 내게, 선생님은 나의 은사이시다. 그리고 나는 자주 찾아뵙지도 못하는, ‘후레자식’ 같은 제자다. 내 맘대로 은사 선생님이시다. 그래도 마음에 늘 자리하신 나의 은사 선생님이, 맙소사, 칠순이시다. 할배가 되신 거다. 놀랍지 않나. 큰 술잔 하나 올리며 축하드리지 않을 수 없다.

KimSH

우리 ‘뚱땡이’ 할아버지가 걸어간다. 이미 걸어온 길이 수만 리, 이 참에 수만 리를 더 갈 참이다. 늘 그랬듯이 인생은 아름답고, 그런 인생이 만드는 역사는 진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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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행 (金秀行, 1942년 10월 24일 ~ 2015년 8월 1일)

“지금 우리 대중들은 우리 세대보다 훨씬 더 능력도 있고, 의식도 높아요. 대통령까지 물러나면 당장이라도 나라가 난리 날 것처럼 하겠지만, 그렇지 않아요. 집권층을 대신할 만한 인재들이 많이 있어요. 젊은 사람들이 나서서 국가를 혁신해야지.”

“지금 말이에요. 우리가 문제를 정확히 인식해야 돼. 우리 아이들이 저렇게 죽어갔는데, 우리 주변 사람들 삶도 마찬가지야. 전 세계에서 노동자들이 가장 많이 죽어 나가는 나라가 우리나라예요. 억울한 우리 아이들뿐 아니라 우리의 삶도 살려내라고 요구를 해야 돼요. 그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국가예요.”

김수행, 2014년 5월 오마이뉴스 인터뷰 중에서

고인께서 생전에 뿌린 의미의 씨앗들이 더 크게 자라나길 기원합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2015년 8월 2일,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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