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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x type=”note” ] 널리 알려진 사람과 사건, 그 유명세에 가려 우리가 놓쳤던 그림자,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제네바에서 온 편지’에 담아 봅니다. (편집자) [/box]

모리시 (사진: 2004년의 모습, CC BY SA)

스미스(The Smiths)라는 밴드의 ‘주모’역할을 하다가 혼자 살림을 차린 모리시(Morrissey). 영국이 시도때도없이 자랑하는 가수, 그러나 그건 내 알 바 아닌, 그래서 사실 난 잘 모르는 그런 가수다.

내가 그나마 들어본 노래가 ‘매일 일요일'(‘Everyday is Sunday’)이다. 매일 일요일처럼 놀아서 신 난다는 노래인 줄 알았다. 일요일 다음이 일요일 아님을 참으로 발랄하게 알려주는 ‘일요일이 다 가는 소리’라는 노래에 익숙해진 내게는 ‘매일 일요일’이라는 인식론적 대전환이 고맙기까지 했다.

그러나 아주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 누가 알려 주었다. 휴가시즌이 지나 버려진 바닷가에 마치 아마겟돈이 오는 듯한 음습한 모습을 참혹하게 묘사한 노래라고. 말하자면 내 짧은 영어의 경계 밖에 있는 그런 노래였다. 그 이후론 물론 안 들었다. 자존심이 상해……

대처의 죽음을 기뻐한 사람들

맨체스터 출신들이 대부분 그렇지만 모리시는 1980년대 영국을 떡 주무르듯이 한 ‘철의 수상’ 마가렛 대처를 증오했다. 지난해 봄에 그녀가 죽었을 때도 원자 크기만 한 측은지심도 내어 줄 수 없는 악의 화신이라고 퍼부어댔다. 거리에서는 ‘경사 났네’하며 축제를 벌이는 이들도 있었다.

대처의 죽음을 기념(?)하는 디자인
대처의 죽음을 기념(?)하는 디자인
“나는 여전히 대처가 싫다” 2013년 4월 13일 영국 트라팔가 광장 (사진: chrisjohnbeckett, CC BY NC ND)
2013년 4월 13일 영국 런던 트라팔가 광장에 대처의 죽음을 기뻐하는 사람들 (사진: simonm1965, CC BY NC)
tiger_philly, CC BY NC SA
tiger_philly, CC BY NC SA

내가 아무리 그들처럼 치즈를 같이 우걱거리며 먹고 산 지 어언 20년이 되어 가지만, ‘죽은 마당에 이럴 것까지야’ 하는 의구심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다행히 싸가지없는 놈이라는 생각까지는 들지 않았는데 이건 그나마 이제 내 몸속에서 반쯤 DNA로 굳어진 치즈의 힘 덕분이라 자위했다.

그때 알았다. 대처에 대한 모리시의 증오는 곧 그의 역사이고 몸이었다. 그리고 그 주체할 수 없는 증오를 고스란히 노래로 녹여 내었다. 대처의 권력이 정점에 다다른 1988년, 그의 첫 번째 싱글앨범이 나온다. 그 앨범의 마지막 노래는 대처에게 바쳐졌다. 제목은 기름기를 쫙 뺀 액면 그대로다.

단두대 위의 마가렛 대처

부드러운 기타 선율에 맞추어서 그는 속삭이듯이 이렇게 노래한다. 목소리를 단 한 번도 높이지 않는다.

YouTube 동영상

“착한 사람들은 멋진 꿈을 꾼다네/ 단두대 위의 마가렛/ 너 같은 사람은 우리를 너무 피곤하게 해/ 언제 죽을 거니/ 언제 죽을 거니/ 너같은 사람 때문에 우리 속은 늙어가네/ 제발 죽어줘/ 착한 사람들은 이런 꿈을 숨기지 않지/ 그걸 현실로 만드는 거야/ 그 꿈을 이루어 내는 거야/ 현실로 만들어 버리는 거야”

– 단두대 위의 마가렛 대처 (Margret on the Guillotine)

영국 경찰은 비밀리에 조사에 들어간다. 혹시나 모리시가 정말로 대처를 죽이려고 하는지 걱정한 것이다. 1980년대 중반에는 ‘여왕은 죽었다’는 제목이 달린 앨범도 냈으니, ‘여왕도 죽인다는데 수상 정도야……’ 이런 걱정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체포로 연결되는 불상사는 없었다. 물리적 위협이 없는 예술적 행위로 봤다는 얘기겠다. 게다가 대처는 그 이후 무려 35년 이상을 더 살다가 지난해 봄에 세상을 떠났다.

증오와 예술 사이에 난 아주 좁은 오솔길

“죽어라, 죽이겠다”를 예술적으로 표현한 모리시는 대처가 죽은 그 해에 자서전을 냈다. 나도 살다 보니, 살아있는 가수의 자서전을 읽는다. 그가 궁금해진 탓이다. 펭귄 출판사 고전 시리즈에서 나왔다. 역사적으로 손꼽히는 고전들만 실리는 그곳에 꼭 출판해야 한다고 모리시가 땡 고집을 부렸다고 한다.

모리시가 펭귄출판사에서 펴낸 자서전 (2013)
모리시가 펭귄출판사에서 펴낸 자서전 (2013)

전례 없는 일이라면서 논평가들은 난리를 쳤다. 그에게는 죽음과 삶, 그리고 역사와 현재의 구분은 그다지 의미가 없나 보다. 모리시에게 대처는 아마도 그의 노래와 함께 1988년에 이미 죽은 인물이었을 것이다.

아, 이 예술의 경지를 어찌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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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댓글

  1. 기사를 잘쓰다 말고 화장실 가버린 느낌이군요…
    영국에선 대처를 기뻐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는 기사인건지… 모리시라는 가수를 소개하는 기사인건지…
    한국의 보수우익들이 숭앙해 마지 않는 대처이지만 영국에선 그 죽음을 기뻐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광장에 모여 기뻐하는 모습이 꽤 충격적인데… 그사람들이 한국정서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의 죽음에 환호하는 모습이 왜그런지는 전혀 설명하지 않고 있고…(미루어 짐작은 하지만…) 갑자기 모리시라는 가수 이야기를 하다가 급하게 끝내 버리니 어리둥절 합니다…
    블로그나 페북에 떠도는 글을 급히 퍼온 느낌이라고 하면 마음 상하실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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