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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x type=”note”] 일상, 평범하지만 그래서 더 특별한 이야기들이 지금도 우리의 시공간 속을 흘러갑니다. 그 순간들을 붙잡아 짧게 기록합니다. ‘어머니의 언어’로 함께 쓰는 특별한 일기를 여러분과 함께 나눕니다. (편집자) [/box]

 

 

책꽂이가 몇 개 되지 않아 바닥에 책을 쌓아두곤 한다. 중고 책을 몇 권 사온 날 방구석엔 작은 책 봉오리 하나가 새로 생겼다. 어머니가 보시고는 한 말씀 하신다.

“저건 또 뭐냐.”

“책이죠.”

“놓을 데도 없는데…”

“흠… 그래도 제가 책이 많은 편은 아니에요. 책 좋아하는 사람들 중에서는 저보다 다섯 배, 열 배 가진 사람도 꽤 있을 거예요. 꼭 부자라서 그런 건 아니고요.”

“그렇구나. 그 사람들은 그걸 다 읽나?”

“아닐 거예요. 그래도 글을 쓰다 보면 자기한테 무슨 책이 있는지, 그 책에 대략 무슨 내용이 들어 있는지 알기만 해도 큰 도움이 되거든요. 그런데 꼭 필요한 내용이 생각나도 책을 이리저리 찾아야 하면 쓰기의 흐름이 끊기는 경우가 많아요.”

“하긴 요리를 해도 여러 가지 재료나 그릇들, 또 이런저런 도구들이 갖추어져 있으면 요리가 금방 나오긴 하지. 지식도 당연히 그렇겠네.”

“네네. 맞아요. 바로 그거예요.”

http://www.flickr.com/photos/litlnemo/ litlnemom, CC BY NC SA
litlnemom, CC BY NC 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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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

 

아침에 고등어를 먹다가 루시드 폴의 ‘고등어’ 생각이 났다. 느닷없이 입에서 이 노래가 흘러나왔다.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머니가 받으신다.

“어디로 가는가.”

“(ㅎㅎ)  그 다음이 뭐죠?”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아 맞다. 그거였죠.”

“응, 그거지.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어머니와 번갈아 가면서 ‘하숙생’을 부른다.

“여행이 좋긴 한데, 힘들 때도 있는 거 같아요.”
“그렇지. 여행 가면 좋긴 좋은데 좀 오래 있으면 얼마나 힘든데. 집이 좋지.”
“네네. 집이 좋죠. 편하구요.”

구름 흘러가듯 정처 없이 출근한다.
정해진 시간, 정해진 곳으로 가지만
그저 나그네일 뿐.

http://www.flickr.com/photos/hockadilly/ hockadilly, CC BY NC
hockadilly, CC BY 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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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막길

 

십여 년 전 아마추어로 음악을 만드는 동생에게 물었다. “악상이 잘 안 떠오르면 어떻게 해?” 동생은 별 주저 없이 이야기했다.

응, 억지로 만들려고 하지 않고 재래시장에 가. 시장 가서 정육점에 매달린 고깃덩어리도 보고, 형형색색 과일도 보고, 죽어 누워 있는 생선도 보고, 아주머니들 할머니들 흥정하고 이야기하는 거 들으면서 사는 게 뭔지 느껴보는 거지. 출출하면 시장 어귀 떡볶이도 사 먹고. 그렇게 한참 사람들과 시끌벅적한 장터거리 속에서 숨 쉬다 보면 뭔가 떠오를 때가 있거든. 그래도 뭐 아무것도 안 떠오르면 잠도 자고. 하하.

(동생의 곡/연주로 ‘길’을 듣습니다.)

난 지금 시도 쓰지 않고 음악도 만들지 않지만, 산책에서 사는 힘과 살아갈 영감을 얻는다. 아름답고 멋진 풍경들 속에서 마음을 맘껏 뛰놀게 한다. 빛과 색의 향연 속에서 벅차오르는 기쁨을 맛본다. 자연의 신비와 대면한다.

하지만 언제나 돌아오는 길은 이 오르막길이다. 삶의 잔 때가 그대로 묻어 있는 오르막. 허리 굽혀 올라야 하고, 발끝으로 조심조심 내려야 하는 그런 오르막. 눈 쌓이는 겨울이면 굴러서 다리 분질러지기 딱 좋은 그런 오르막. ‘가난의 풍경’이라고 불러도 좋을, 그런 오르막.

하지만 오늘 돌아오면서 이 오르막길이 고마웠다. 어쩌면 이 오르막 때문에 나 자신이 나약해지거나 방만해지지 않았을지도 모르겠기에. 아름다운 하늘, 찬란한 빛에 홀린 영혼을 다시 질긴 삶의 바닥으로 끌어 내리는 길, 내가 지금 어디 있는지를 가감 없이 알려주는 길이다. 그런데 참으로 다행인 것은 힘들어도 동네 사람들과 함께 오를 수 있고, 고개를 들면 작은 화단에 심긴 꽃나무를 볼 수 있고, 올라간 다음에는 어머니 그리고 어머니가 준비한 저녁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

이 길을 같이 걸어주는 사람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은 5월의 어느 저녁이다.

어머니의 저녁이 기다리고 있는 오르막 길 (사진: 김성우)
어머니의 저녁이 기다리고 있는 오르막길 (사진: 김성우)

책,  2013년 7월 9일
나그네, 2013년 10월 23일
오르막길, 2013년 5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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