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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x type=”note”]슬로우뉴스는 ‘2013년 올해의 인물’로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의 은폐, 축소를 폭로한 권은희 수사과장과 NSA의 전 세계적인 감시 시스템을 폭로한 에드워드 스노든을 선정했습니다. 내부고발은 역사의 중대한 고비 때마다 좀 더 나은 세상에 관한 믿음을 붙잡는 희망의 증거였습니다.

새해 벽두에 내부고발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돌아 보는 것은 그래서입니다. 영화(‘내부고발자’, 2010)를 매개로 하는 글의 성격상 해당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편집자) [/box]

나는 내부고발자에 대한 각별한 애정이 있다. 그들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뿌리 뽑힌 자’이며 ‘고향이 없는 자’이고, ‘산채로 매장당한 존재’들이며 ‘자발적 디아스포라’를 실천한 이들이기 때문이다. (디아스포라: 그리스어 ‘διασπορά’, 본토를 떠나 영원히 그 밖에 자리 잡은 집단이나 그 현상.)

우리 역사 고비 때마다 내부고발이 있었다 

내부고발이라고 하면 우리는 습관처럼 멀리 미국의 워터게이트 사건을 떠올리지만 사실 우리 역사에도 중요한 고비마다 내부고발이 있었다.

지난 1990년 10월 5일 윤석양 이병은 NCC인권위원회 사무실에서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을 고발하는 양심선언을 했다. 양심선언 직후 그는 특수군무이탈혐의로 긴급 수배되어 2년간의 도피 생활 끝에 체포되었고, 다시 2년간의 옥살이 끝에 지난 1994년 11월 만기 출소했다. 당시 국방부는 1,300여 명에 이르는 민간인 사찰 명단 등 증거 공개에도 불구하고, 전시나 비상시에 적 또는 불순분자로부터 사회 요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인명록이라고 발뺌했다. 그러나 민간인 사찰을 목적으로 서울대 앞에 현역 군인들을 동원해 위장 술집까지 운영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보안사가 해체되었다.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을 폭로하는 윤석양 이병 (사진: 경향신문, 민주화기념사업회)  윤석양 이병 사건을 소재로 만들어진 영화 [모비딕] (박인제, 2011)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을 폭로하는 윤석양 이병 (사진: 경향신문, 민주화기념사업회)
윤석양 이병 사건을 소재로 만들어진 영화 [모비딕] (박인제, 2011)
또 지난 1992년 3월 22일 14대 총선을 이틀 앞두고 공명선거실천협의회에서는 당시 육군 9사단 소대장으로 근무하던 이지문 중위가 군 내부의 투표부정행위에 대해 양심선언을 했다. 기자회견을 마친 그는 곧바로 군 수사기관에 연행되었고, 파면되어 이등병으로 전역했다. 그리고 1995년 2월 대법원으로부터 파면 취소 판결을 받아 중위로 명예 전역할 수 있었다. 그의 양심선언 이후 군 부정투표행위에 대한 제보가 잇따라 쏟아졌고, 군부재자투표제도가 개선될 수 있었다.

1992년 3월 이지문 중위(우)가 공선협 사무실에서 자신의 부대 내 부재자 투표 부정사실을 폭로하는 모습   ⓒ연합뉴스
1992년 3월 이지문 중위(우)가 공선협에서 부재자 투표 부정사실을 폭로하는 모습 ⓒ연합뉴스

그러나 양심에 따라 내부고발에 나섰던 이들에게 우리 사회는 냉정했다. 지난 2007년 초 모 일간지 기사에 따르면 지난 1990년 이후의 내부고발자 20명 가운데 80%(16명)가 징계와 해고를 경험했고, 이 가운데 11명은 무직 상태에 놓여있다고 한다. 내부고발자들은 집단따돌림 으로 인한 우울증, 불면증, 대인기피증, 편집증 같은 정신질환과 소화불량, 신경성 장염, 급성 간염 등을 앓기도 했다. 심지어 지난 2003년에는 사학비리를 내부고발했던 사람이 청부살인을 당하기도 했다.

"[공익 제보] 버림 받는 제보자들" (한국일보, 2007년 1월 29일)  (사진: 한국일보 사이트 갈무리)
“[공익 제보] 버림 받는 제보자들” (한국일보, 2007년 1월 29일)
(사진: 한국일보 사이트에서 갈무리)
이지문 중위가 삼성에 특채됐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지문은 1991년 삼성전자에 특채됐었고, 장교 전역 뒤에는 복직하겠다며 휴직서를 냈다. 하지만 이듬해 내부고발과 함께 삼성 입사는 물거품이 됐고, 18년 만인 지난 2010년 삼성그룹을 상대로 복직을 요구했지만, 삼성은 이를 거부했다.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의 복직 권고에도 불구하고 삼성전자는 “적합한 직무가 없다”고 위원회에 간단히 통보했을 뿐이다. 그는 한때 서울시의원(민주당)으로 활동했고, ‘공익제보자와함께하는모임’ 부대표로 맡아 내부고발자 권익을 신장하기 위해 뛰었다. 전국공무원노조(정책연구원), 흥사단 등에서도 활동을 했던 그는 현재 호루라기 재단 상임이사를 맡고 있다.

다양한 사회운동을 해왔던 이지문 씨는 현재 호루라기 재단 상임이사로 일하고 있다.  (사진: 늘푸름(이지문) 블로그)
서울시의원을 거쳐 다양한 사회운동을 해온 현 호루라기재단 상임이사 이지문 씨
(사진: 늘푸름(이지문) 블로그)

영화 [내부고발자] 통해 본 내부고발의 세계 

우리 영화 가운데에는 아직도 ‘내부고발’ 문제를 제대로 다룬 사례가 별로 없지만, 외국 영화들 가운데에는 내부고발 문제를 심도있게 다룬 영화들이 제법 있다. 지난 2010년에 개봉된 영화 [내부고발자](The Whistleblower, 2010)는 그런 면에서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이 한 편의 영화 속에서 내부고발이 지니고 있는 여러 문제들을 비롯해 국가권력의 민영화, UN 같은 국제기구의 활동에 이르는 다양한 문제들을 복합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내부고발자](The Whistleblower: 라르사 콘드라키, 2010)
[내부고발자](The Whistleblower: 라르사 콘드라키, 2010)
이 영화의 주인공 레이첼 바이스는 우리에게는 주로 [미이라], [본 레거시] 같은 영화들로 알려진 편이지만, 진지한 영화에 출연해 좋은 연기를 펼치는 배우이기도 하다. 지난 2005년 영화 [콘스탄트 가드너]에서 다국적 제약회사가 허가받지 않은 신약을 아프리카 등의 제3세계에서 불법적으로 임상 실험하는 실태를 고발하다 살해당하는 내부고발자 역을 맡은 적이 있었는데, 레이프 파인스와 함께 애절한 사랑 연기를 펼치기도 했다. [내부고발자]에서는 바네사 레드그레이브를 비롯해 탄탄한 연기력을 가진 배우들이 다수 등장하지만, 그중에서도 레이첼 바이스는 단연 돋보인다. 간혹 레이첼의 연기가 딱히 잘한다는 느낌이 딱히 들지 않을 수도 있는데, 그 이유는 이 배우의 연기가 상당히 절제된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영화 [내부고발자]에서 UN 평화유지군을 연기하는 레이첼 바이스
(사진: Sophie Giraud, © 2011 – Samuel Goldwyn Films)

‘평화라는 이름의 범죄’ 고발하며 겪는 부조리…실화

이 영화는 실화다. 미국 네브래스카 주 경찰로 근무하던 캐스린(Kathryn Bolkovac)은 경제적 이유 등으로 전남편에게 아이들의 양육을 맡기고 있지만, 돈을 벌어 아이들 양육비에 보태고 싶은 평범한 엄마였다. 빠듯한 경찰 봉급으로는 자신은 물론 딸의 양육비를 보태기 어려웠기 때문에 그녀는 UN의 보스니아 평화유지군, 정확하게는 국제기동경찰대(International Police Task Force)에 자원한다.

앨빈 토플러는 『부의 법칙과 미래(2003)』에서 이렇게 말했다. “국가가 폭력의 독점권을 잃어버린 시대에, 유엔의 계약을 따낸 민간 기업에 고용돼 비살상용 무기를 포함한 미래의 무기로 무장하고 전쟁을 벌이는 자발적 용병 조직을 만들어 내는 건 어떨까?” 영화 속 캐스린이 자원한 국제기동경찰대가 바로 보스니아에 파견되어 치안유지 임무를 맡은 UN과 계약한 민간용병회사다.

현실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민족과 종교 갈등으로 인해 처참한 내전을 경험한 보스니아에 파견된 캐스린은 이곳에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매우 낮으며 가정폭력이 다반사로 벌어짐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처벌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캐스린은 가정폭력 피해자를 수사해 가해자를 기소하는 성과를 거둔 덕분에 국제경찰기동대의 여성분과 팀장을 맡게 된다. 그 와중에 ‘플로리다 바’라는 한 유흥업소에서 탈출한 미성년 여성들이 인신매매로 팔려와 이곳에서 강제로 성매매에 종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캐스린은 두 명의 어린 여성을 현지인이 운영하는 여성쉼터 ‘제니트’로 후송하지만, 나중에 알아보니 그 두 사람은 ‘제니트’로 후송되지 않았고, 중간에 빼돌려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사건의 전모를 알아보기 위해 제니트의 책임자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플로리다 바’의 주요 고객들은 현지 남성들이 아니라 평화유지군 및 국제기동경찰대로 파견된 남성들이란 사실이었다. “알다시피 우리는 오랫동안 내전을 치렀기 때문에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훨씬 많다. 이곳 남성들이 그런 곳을 찾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평화라는 이름 아래 벌어지고 있는 범죄였다.

UN 보스니아 평화유지군이 묵인하고, 공조하는 인신매매와 성매매를 고발하는 영화 [내부고발자]
(사진: © 2011 – Samuel Goldwyn Films)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캐스린은 인신매매된 여성들을 돕기 위해 다양한 경로로 방법을 알아보지만 국제송환기관(GDA)를 비롯해 여러 국제기구들은 규칙과 법규의 제한 등을 이유로 나서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캐스린이 속해있는 국제기동경찰대(ITPF)를 비롯해 군대, 국무부 등 누구도 수사에 협조하지 않을뿐더러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압력을 가해왔다. 그 와중에 캐스린에게 처음에 증언하겠다고 말했던 여성이 살해당하는 사건까지 발생하면서 결국 해고당한다. 우여곡절 끝에 사건의 내부 자료를 빼돌린 캐스린은 이런 사실을 BBC에 제보하고, 재판을 통해 그녀에 대한 해고가 부당해고였다는 판결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선택의 갈림길: 침묵할 것인가 분노할 것인가 

영화가 끝난 뒤 자막이 올라간다.

“캐스린이 보스니아를 떠난 뒤 그녀를 고용했던 민간업체를 비롯한 평화유지군은 본국으로 송환되었지만 이 사건과 관련한 그 누구도 형사 처벌되지 않았고, 캐스린을 고용했던 민간 용병업체는 지금도 미국정부와 계약하여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등지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캐스린은 그 이후 어떤 국제기관에도 취업할 수 없게 되어 현재 네덜란드에 거주하고 있다

영화에서 캐스린을 후원하는 인물로 UN 관계자로 등장했던 바네사 레드그레이브는 이렇게 말한다.

“면책권이 무죄는 아니다(Immunity not impunity).”

사회의 공공선을 증대시킨다는 차원에서 조직과 사회의 이해가 항상 합치되는 것은 아니며, 조직에 속한 개인과 사회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개인은 조직의 이해와 공공선의 증대라는 차원에서 누구라도 항상 선택의 기로에 설 수 있다. 만약 공동체가 그들을 보호하지 않고, 사회적 희생양으로 전락하는 것을 방치한다면 개인은 그 나름으로 가장 합리적이고 현명한 선택 즉, 자신의 양심과 도덕에 따른 의무를 다할 때 내가 피해를 본다면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침묵하는 것이 낫다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내부고발은 사회의 성역에 대한 도전이다. 20년 전 겨울공화국을 살아가던 우리에게 독재권력, 정치권력이 성역이었다면 외환위기 이후 15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분노할 것인가, 침묵할 것인가의 기로 앞에 서 있다. 지난 2007년 김용철 변호사의 내부고발 사건을 우리 사회가 어떻게 처리했던가? 정신적 불구를 강요하는 사회가 지속하면 우리 내부에서 울려 퍼지는 양심의 소리는 설 자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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