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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x type=”note”]투쟁과 분노로 일어선 사람, 하지만 그가 남긴 건 증오가 아니라, 미움이 아니라, 용서와 화해였습니다. 한 위대한 인간이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전 대통령 넬슨 만델라(1918년 7월 18일~2013년 12월 5일)는 오랫동안 우리의 가슴 속에 남을 것입니다.

악명 높은 남아공의 인종분리정책(아파르트헤이트)를 깨뜨리기까지 많은 이들이 피 흘렸습니다. 인종분리정책의 기원과 인종분리정책에 균열을 일으킨 1976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소웨토 항쟁을 소개하는 일은 그저 만델라를 추모하기 위한 의미만은 아닙니다.

그 야만의 역사, 그리고 그 야만에 몸 바쳐 저항한 이들의 생생한 투쟁을 직시하는 것, 그것만이 진실한 화해의 조건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box]

MANDELA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역사 – 남아공은 어떻게 백인들의 땅이 되었나?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약 5백만 명의 백인과 2천5백만 명의 흑인 및 유색인이 공존하는 나라다. 이곳에 백인이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1652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지시로 얀 반 리베이크가 희망봉에 항해 기지를 세우면서부터다. 당시 네덜란드와 인도, 인도네시아를 오가던 무역선의 선원들은 오랜 항해로 비타민 섭취가 부족하여 괴혈병에 걸리곤 하였다. 괴혈병은 잇몸에서 피가 나고 사지가 퉁퉁 부어 죽어가는 무서운 병이었다.

얀 반 리베이크의 임무는 괴혈병을 막기 위한 조치로 신선한 채소와 과일을 재배하여 선원들에게 공급하는 것이었다. 시간이 흐르자 더 많은 네덜란드 인이 항해 기지로 이주해왔고, 그들 일부는 대륙 안쪽을 개척하여 자유 농부가 되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네덜란드인이 아닌 ‘아프리카너’라고 불렀고, 네덜란드어에 뿌리를 둔 일종의 방언을 만들어 썼는데 이것이 아프리칸스어다.

19세기 초, 세계를 제패한 영국은 남아프리카 케이프타운을 점령하여 식민지로 만들었다. 네덜란드계 아프리카너들과 영국인 사이에 분쟁이 발생했고, 아프리카너들은 수레에 짐을 싣고 내륙의 더 안쪽으로 ‘대이주’를 감행했다. 그들은 호전적인 줄루 족과 싸우면서 오렌지공화국과 트란스발공화국이라는 두 개의 독립 자치국을 만들었다. 아프리카너들은 철저한 칼뱅주의자이었고 아프리카를 신이 그들에게 내려준 선물로 보았다. 하기에 아예 헌법으로 ‘흑인은 공화국의 시민이 될 수 없음’과 ‘백인과 흑인은 절대로 평등할 수 없음’을 못 박았다.

그런데 오렌지 공화국의 킴벌리에서 다이아몬드 광산이, 트란스발의 요하네스버그에서 금맥이 발견되자 영국은 두 공화국과 영국령 케이프타운을 강제로 합병시키려 했다. 이에 반발한 아프리카너들이 영국과 전쟁을 벌였으니 이것이 보어전쟁(1899~1902)이었다. ‘보어(boer)’란 네덜란드 말로 농부(부르)라는 뜻이며, 아프리카너들이 스스로를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이었다. 사실 이 전쟁은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보기에는 똑같이 기독교를 믿고 똑같이 흰 피부를 한 인종들끼리 금과 다이아몬드 때문에 죽고 죽이는 황당한 상황이었다. 어쨌든 전쟁에서 2만8천명이 전사하고 영국이 승리하여, 이 땅 전체가 영국이 지배하는 남아프리카연방이 되었다.

▲ 아프리카너 유격대. 영국군은 맥심 기관총을 가진 이 하얀 피부의 "원주민들"과 거친 대게릴라전쟁을 벌여야 했다. 결국 우수한 화력을 보유한 영국군이 승리했는데, 그 과정에서 아프리카너 민간인들을 무수히 학살했다.
▲ 아프리카너 유격대. 영국군은 맥심 기관총을 가진 이 하얀 피부의 “원주민들”과 거친 대게릴라전쟁을 벌여야 했다. 결국 우수한 화력을 보유한 영국군이 승리했는데, 그 과정에서 아프리카너 민간인들을 무수히 학살했다.

흑백 분리 정책의 대두

20세기 초 영국은 대외 정책이 변함에 따라 남아프리카에서 서서히 물러나고 아프리카너들이 권력을 잡았다. 아프리카너의 엘리트들은 기독교 근본주의자이자 백인 우월주의자들이었고, 영국이 남긴 천연자원 독점권을 이어받아 부를 쌓았다. 이들은 남아프리카를 백인들의 나라로 만들고 싶었고 이를 위해 원주민토지법과 도시구역법 등을 만들어 흑인의 권리를 박탈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인종 분리는 그렇게 철저하지 않았고 위반도 잦았다.

1940년대에 정치인 다니엘 프랑수아 말란이나 젊은 지식인인 헨드릭 페르부르트 등 인종 분리 운동의 새로운 기수들이 등장했다. 그들은 나치 독일에서 그 전례를 찾았다. 민족의 영광과 순수함을 끝없이 반복해 세뇌시키는 나치는 그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하지만 그들이 처한 상황은 독일과는 달랐다. 독일에서 유대인은 상대적으로 소수였기 때문에 수용소에 몰아넣고 심지어 ‘말살’해버릴 수 있었지만, 남아프리카 인구의 절대다수는 흑인과 혼혈인이었다. 이들을 몽땅 제거할 수도 없었고 또 그렇게 했다간 생산 현장이 돌아가지 않아 백인들이 그 일들을 하게 될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냥 내버려두면 흑인들이 백인의 기득권과 생존까지 위협할 거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유색인들과 공존해야 하오. 그러나 공존하되 철저히 분리되어야 합니다! 유색인들은 백인의 남아프리카와 절대로 섞여서는 안 됩니다!”

말란과 페르부르트 무리가 지닌 이 광기 어린 신념은 집권 국민당에 의해 ‘아파르트헤이트’라는 구체적 조치로 실현되었다. 1948년 이후의 아파르트헤이트는 말 그대로 철저하고 무자비한 분리 정책이었다. 국민당 정부는 자그마치 1,750여 개의 악명 높은 법률들, 기막힌 명령들을 쏟아냈다. 전체 인구의 5분의 1에 불과한 백인들, 그 가운데에도 절반이 투표하여 나라 안 모든 인종들의 운명을 좌우할 법을 통과시킨 것이었다.

그들은 집단지구법을 만들어 인구 75퍼센트를 차지하는 흑인과 혼혈인을 전 국토의 13퍼센트에 불과한 벽지에다 몰아넣었다. 여러 인종이 섞여 살고 있던 디스트릭스 식스나 소피아타운 같은 곳에서 흑인을 분리해내기 위해 경찰은 하루 이틀 전에 통보하거나 심한 경우 통보조차 없이 불도저로 밀고 들어왔다. 저항하는 흑인들은 경찰이 개를 풀어 물어뜯게 했다. 흑인들은 새벽에 옷가지를 겨우 챙겨 살던 집에서 쫓겨났다. 이름도 기상천외한 부도덕법과 이민족혼인금지법은 다른 인종 간의 성관계를 금지했고 적발되면 최고 7년형에 처해졌다. 이 법의 가장 사악한 부분은 ‘현장 검거’를 위해 경찰이 밤중에 아무 집이나 영장 없이 들어갈 수 있다는 점이었다.

모든 사람들은 백인·흑인·혼혈인·아시아인 가운데 하나에 등록되어야 했다. 이를 위해 인종분류위원회가 활동했는데, 이 위원회가 “너는 백인이 아니라 사실은 혼혈인”이라고 결정하기만 하면 졸지에 멀쩡한 부부가 불법화되고 아이들은 고아가 되었다. 1950년대 초 초등학교에서 이런 일도 있었다. 산드라 랭은 부모가 백인 부모를 둔 백인 아이였으며 자신이 백인이라는 사실에 대해 한 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누군가의 제보로 인종분류위원회가 학교에 찾아와 조사한 결과, 랭은 혼혈이라고 판정을 받아 학교에서 쫓겨났다. 그 조사라는 것은, 머리의 가르마에 연필 한 자루를 눕혀 놓고 그것이 모발을 따라 흐르다 땅에 떨어지면 백인, 떨어지지 않고 곱슬머리에 걸리면 혼혈인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내용이었다.

▲ (좌)아파르트헤이트 당시 백인 전용 시설임을 알리는 간판. (우)아파르트헤이트 반대 포스터
▲ (좌)아파르트헤이트 당시 백인 전용 시설임을 알리는 간판. (우)아파르트헤이트 반대 포스터

시설분리법에 따라 식당, 카페, 극장, 화장실, 공원 벤치, 역 대합실 심지어 바닷가에 이르기까지 백인과 유색인 전용이 따로 만들어졌으며 흑인이 백인 전용 벤치에 앉기만 해도 감옥에 갈 수 있었다. 반투자치법에 의해 흑인들은 이 나라에 살면서도 이론적으로 ‘다른 나라 국민’이 되었고, 따라서 투표권이 주어지지 않았으며, 공공 의료나 수도, 전기 서비스도 거의 누릴 수 없었다. 반투교육법은 흑인과 백인의 분리 교육을 정당화했다. 또한 백인 병원이 혼혈인 환자를 받으면 형사 범죄에 해당했으므로, 교통사고 중상자를 앞에 두고 구급 요원이 그가 백인인지 혼혈인인지 따지느라 시간을 허비하는 바람에 길에서 죽게 만든 일도 있었다.

흑인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단 한 평의 땅도 구매할 수 없었으며, 언제나 통행증과 신상 정보를 적은 수첩을 소지해야 했고, 만약 지정된 거주지를 벗어나 도시에서 일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자기 숙소에 아내와 자녀를 사흘 이상 재울 수 없었다. 심지어 18세 이상의 자녀와 동거하는 것만으로도 불법이었고 이를 확인하기 위해 경찰은 어느 때고 흑인의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결국 백인 엘리트들이 말한 ‘분리’는 절대로 공존의 조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백인들이 사회의 부를 독차지하기 위해 흑인들에게 가한 비인간적인 차별과 억압일 뿐이었다.

소웨토 봉기 – 한 소년의 죽음이 아파르트헤이트의 조종을 울리다

소웨토 시는 아파르트헤이트의 결과로 생긴 남아프리카공화국 최대의 흑인 거주지였다. 1970년대에 120만 명의 흑인이 수도도 전기도 나오지 않는 아파트에 빽빽하게 살았으며, 이곳의 평균 수명은 40세에 불과했고, 인구의 절반은 실업 상태였다. 술과 마약과 폭력이 판을 쳤으며 미래에 대한 기대감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런 곳에서 아이들의 유일한 희망은 학교였다. 흑인 아이에 대한 정부의 지원은 백인 아이의 10분의 1에 불과했지만, 그럼에도 아이들은 배움을 통해 더 나은 아프리카 인이 되고자 애쓰고 있었다.

그런데 백인 정부는 지금까지 영어와 아프리카 부족어로 교육하던 학교에 아프리칸스어를 도입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아프리칸스어를 가르칠 교사도 교재도 없었고 무엇보다 그 언어는 남아프리카의 백인들 말고는 아무도 쓰지 않는 언어였다. 한마디로 이 조치는 흑인들에게 ‘너희는 이 나라 백인의 하인 외에는 될 수 없다.’고 하는 권력의 독선이자 조롱이었다.

1976년 4월, 올랜도웨스트 학교의 흑인 학생들은 아프리칸스어 수업을 보이콧하기로 하고 등교 거부 운동을 펼쳤다. 등교 거부는 인근 학교로도 퍼져 나갔고 학생들은 아프리칸스어 교재를 불태웠다. 6월 16일에 올랜도웨스트를 선두로 한 1만여 명의 학생이 교육청에 항의하기 위해 평화 행진을 시작했다. 행진은 전통춤과 노래가 섞여 아프리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축제 같았다. 아이들은 플래카드를 들고 어깨를 들썩거리며 화이트시티 교차로로 향하고 있었다.

“배우려고 학교에 들어와, 하인이 되어 나간다!”
“아프리칸스어를 타도하자!”
“백인에 의한 반투 교육은 지옥으로 보내자!”

그러나 교차로를 지키고 있는 것은 중무장한 진압 경찰이었다. 학생들은 ‘신이여 아프리카를 보호하소서’라는 영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경찰은 경고도 없이 학생들을 향해 최루탄을 쏘았고, 이에 맞서 돌이 날아오자 곧바로 실탄 사격을 가했다. 방금 전까지 춤과 노래로 채워졌던 거리는 비명과 신음으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경찰은 자기 앞의 시위대를 학생으로도, 인간으로도 보지 않았다. 그들은 백인을 위협하는 짐승에 지나지 않았다.

시위 도중 13살 소년 헥터 피터슨이 진압 경찰이 무차별 발포한 기관총에 가슴을 맞았다. 그의 형이 양팔에 소년을 안고 병원으로 달려갔으나 피터슨은 사망하고 말았다. 헥터 피터슨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소웨토의 흑인 전체가 들고 일어났다. 파업이 시작되었으며 도시 곳곳에서 바리케이드가 설치되었고 경찰서와 공공 기관이 공격당했다. 시위는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갔고 요하네스버그의 백인 대학생들까지 아이들을 살해한 정부에 항의하는 행진을 벌였다. 존 포르스테르 수상은 소요를 용납하지 않겠다며 소웨토에 경찰력을 수천 명이나 추가로 투입하고 길에 세 명 이상 모이는 것을 금지했다. 경찰은 이 사태로 176명이 죽고 1,139명이 부상했다고 집계했지만 실제로는 600~7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고 4,000명 이상 부상당했다. 그중 다수가 어린 학생들이었다.

▲ 총에 맞은 헥터 피터슨. 20세기의 피에타라고까지 불리는 이 사진이 세계에 준 충격은 엄청났다. 사진은 남아공 반 아파르트헤이트 투쟁이 격렬히 타오르도록 했고, 전 세계 문명국과 지성인들이 남아공 정부를 규탄하도록 만들었다.
▲ 총에 맞은 헥터 피터슨. 20세기의 피에타라고까지 불리는 이 사진이 세계에 준 충격은 엄청났다. 사진은 남아공 반 아파르트헤이트 투쟁이 격렬히 타오르도록 했고, 전 세계 문명국과 지성인들이 남아공 정부를 규탄하도록 만들었다.

소웨토 항쟁은 백인들이 흔히 말하는 난동이 아니었다. 이것은 인간다운 교육을 받고 싶다는 정당한 요구에서 출발한 투쟁이었으며, 흑인들은 항쟁 과정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자각했다. 흑인들은 술병을 거리에 깨부수며 “술은 됐다. 학교를 늘려라!”고 소리쳤다. 또한 이 항쟁은 전 세계 시민들로 하여금 아파르트헤이트를 경멸하게 만들었다. 각국 정부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대한 투자를 동결했으며 유명 운동선수들은 남아프리카공화국과의 경기에 출전을 거부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의식 있는 백인들 역시 이 사건을 계기로 정부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소웨토 항쟁은 아파르트헤이트의 심장을 때린 반란이었다. 아파르트헤이트는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서서히 종말로 치달았다.

넬슨 만델라의 투쟁과 화해

소웨토 항쟁을 경험한 학생들은 ANC(아프리카민족회의. 넬슨 만델라가 주도한 반 아파르트헤이트 저항 단체)의 특공대가 되겠다며 몰려들었다. 그들은 국경 밖 기지에서 훈련을 받은 후 국내로 들어와 각종 테러와 게릴라 투쟁을 벌였다. 1980년대 요하네스버그의 정유 공장이 폭파되는 등 이들이 주도하는 테러가 연일 터지고 대중들의 파업과 시위가 격화되자 정부는 계엄령까지 선포하여 더 잔학하게 탄압했지만, 솟구치는 흑인 운동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결국 정부는 최악의 사태인 내란을 막기 위해 태도를 바꾸게 되었다. 그래서 28년이나 구금했던 흑인 지도자 넬슨 만델라를 석방하여 그와 평화 협상을 진행시키고자 했다. 넬슨 만델라는 한때 변호사였다가 ‘민족의 창’이라는 무장 저항 단체를 창설하고 백인 기관을 수백 차례 공격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알제리에 군사 지원을 요청하러 갔다가 돌아오던 길에 체포되어 로벤아일랜드에서 1964년부터 구금되어 있었다.

백인들을 힘으로 몰아내고 흑인 독립국을 세우자는 과격파들도 있었으나 만델라는 통합과 공존을 원했다. 백인 정부의 협상 끝에 마침내 1994년 4월, 민주적인 남아프리카공화국 정부 수립을 위한 선거가 치러졌다. 넬슨 만델라와 2,000만 흑인들은 생전 처음 주어진 투표권을 행사하기 위해 투표소로 향했다. 마을마다 끝없이 이어진 투표 행렬을 찍은 사진은 전 세계를 감동시켰다. 그리고 투표 결과 압도적인 지지를 얻어 만델라가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에 취임했다. 수백 년에 걸친 백인들의 지배와 최악의 인종 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 아파르트헤이트 종식 기념 집회에 모인 남아공 사람들
▲ 아파르트헤이트 종식 기념 집회에 모인 남아공 사람들

백인 극우주의자들은 흑인이 집권하면 “그들이 보복으로 백인을 학살할 것”이라고 선동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만델라는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데스몬드 투투 대주교의 의견에 따라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설치했다. 아파르트헤이트 기간의 인권 유린에 대해 가해자가 직접 잘못을 고백하기만 하면 사면을 해주기로 한 것이다. 이는 반투 족의 전통인 ‘우분투’ 정신에 따른 것이었다. 아무리 큰 죄를 지은 죄인이라도 모두의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이야기한다면 공동체의 일원으로 다시 받아주는 것이다.

약 7,000명의 가해자가 자신이 한 일을 고백했고 2,500명의 피해자가 자신이 당한 일을 증언했다. 흑인 운동가를 악어 밥으로 던졌거나 산 채로 불태워 죽인 끔찍한 일들이 낱낱이 공개되자 당시의 권력자들도 더 이상 “그런 일은 있지도 않았고 있을 수도 없었다.”며 발뺌할 수 없게 되었다. 많은 백인들은 자신들이 그동안 누린 기득권이 얼마나 참혹한 인권 유린 위에 가능했던 것인지 진심으로 반성했다. 백인들은, 비록 원수일지라도 진실을 인정하는 사람은 용서하는 흑인들 앞에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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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오준호 작가의 『반란의 세계사』 중 ‘소웨토 항쟁’에 관한 부분을 인용한 것입니다. 게재를 승낙해준 저자(필자)와 출판사 ‘미지북스’에게 감사드립니다.

13947652반란의 세계사: 이오니아 반란에서 이집트 혁명까지
오준호 지음 | 미지북스 |2011년 | 16,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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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댓글

  1. 친구들과 나이어린 회원들과 공유하고자 스토리에 올립니다. 뜻깊은 글 고맙습니다.

  2. 중학생 독서 카페에 넬슨 만델라에 관해 써야 해서 공유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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