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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에 관해 총리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정작 국민이 기다린 사람은 총리가 아니라 박근혜 대통령이었다. 언제나처럼 이번에도 ‘카게무샤'(군주를 대신해 위험을 떠맡는 대역)가 박근혜 대통령을 대신한다. 박근혜 정권의 ‘그림자’ 정치는 또 다른 장면들을 떠올리게 한다.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나온 장관이 초등학생처럼 보좌진의 말을 ‘컨닝’하고, 대통령 당선인 대변인은 주요 인선의 내용도 모른 채 밀봉된 봉투를 꺼내 기자에게 발표한다. 사람은 있지만, 책임자는 없는 한국 정치의 장면들을 살펴보자.

장면 1 – 2013년 해양수산부 국정감사

2013년 10월 15일 해양수산부 국정감사에서 윤진숙 장관은 국회의원들의 질문에 엉뚱한 답변을 하는가 하면 실무자들이 뒤에서 몰래 알려주고 나서야 답변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http://www.youtube.com/watch?v=NOW9PQCt0FU

수산물 이력제 대상 품목이 몇 개냐는 질문, 제도와 관련해서 예산이 얼마나 되느냐는 질문에는 문해남 해양정책실장이 뒤에서 답을 알려줬고, 방사능 수치가 왜 다른지, 지원 금액이 얼마인지 묻는 질문에는 자리를 바꾼 우예종 기획조정실장이 역시 뒤에서 답을 알려줬다. 심지어 우예종 실장은 “최대한 노력하겠습니다”라는 모범답안까지 조언했다. 이쯤 되면 누가 국감에 나선 증인인지 알 수 없다.

왼쪽부터 윤진숙 장관, 우예종 실장, 문해남 실장
왼쪽부터 윤진숙 장관, 우예종 실장, 문해남 실장

그 외에도 여러 질의에 관해 뒤에서 실무자들이 답을 알려주고, 정작 윤진숙 장관은 ‘앵무새’처럼 그 답을 반복해서 들려줄 뿐이었다. 이 ‘컨닝’에 오류가 있거나 왜곡이 있다면 과연 윤진숙 장관은 책임 있는 주무부처 장관으로서 답할 수 있을까? 이렇게 국정 현안 문제를 주무부처 장관이 책임지고 답할 수조차 없는 시스템은 확실히 정상이 아니다.

장면 2 –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밀봉인사 발표 현장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 시절로 돌아가 보자.

성추행 논란으로 지금은 경질된 당시 윤창중 대변인은 2012년 12월 27일 오후 2시 인선 내용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테이프로 밀봉된 서류봉투를 갖고 들어왔다. 그 봉투에는 인수위원장, 부위원장 등의 인사 내용이 담겨있었다.

즉, 윤창중 대변인은 인선 내용에 대해 전혀 모른 채 그냥 한글을 또박또박 읽은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심지어 당시 대통령 당선인 대변인단은 당일 오전까지 인사 발표 시각조차 몰랐다. 인선 내용이 담긴 봉투를 어디에서 받았는지 물어보는 질문에조차 답하지 못했다. (후에 밀봉된 서류봉투로 시작한 인사 발표는 윤창중의 작작극이라는 의혹이 있었다.)

이를 두고 많은 언론들은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 측의 ‘보안’과 ‘원칙’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 보안을 가장 중시하는 박 당선인의 인사 원칙이 이번에도 지켜진 것 – 한국일보
  • 인사는 철저한 보안 속에 이뤄져야 한다’는 원칙을 지키고 있다는 것 – SBS
  • 박 당선인의 핵심 측근들도 예측하지 못하는 `철통보안’ 원칙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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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radlum, “Shh”, CC BY

과연 이걸 보안과 원칙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바라봐야 할까? 심지어 발표 후 지금까지도 어떤 이유로 인선이 이루어졌으며 대통령이 누구와 상의를 하고 누구의 의견이 가장 크게 반영됐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박근혜 대통령과 밀실에서 함께 했던 사람들을 빼고는.

즉, 당시 인선 내용 발표 당일 오전까지만 해도 발표 시간을 모르던 당시 조윤선 대변인, 봉투에서 꺼내 종이에 적힌 글자만 읽을 뿐 그 내용과 경위에 대해서는 하나도 설명할 수 없었던 당시 윤창중 대변인은 그저 앵무새에 불과한 정치적 소품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장면 3 – 정홍원 국무총리의 대국민 담화문

이제 다시 시계를 돌려 국정원 정치 개입 사건이 드러난 이후로 돌아가 보자.

일단 현재 상황을 간단히 정리해보자. 국정원 정치 개입 사건 특별수사팀이 수사하는 데 힘을 실어줬던 당시 채동욱 검찰총장은 우여곡절 끝에 사퇴했고, 윤석열 특별수사팀장 역시 수사팀에서 배제됐다. 여당과 야당은 수사의 폭과 속도를 놓고 대립했고, 결국 제1야당인 민주당은 장외투쟁까지 결행한 상태다.

박근혜 대통령이 이 사건과 관련하여 아무런 말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지난 2012년 12월 16일 제18대 대통령 선거 당시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는 제3차 TV토론에서 ‘국정원 댓글’이 처음 세상에 알려지게 된 국정원 여직원과 관련된 사안에 관해 이렇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 바 있다.

YouTube 동영상

[box type=”info” head=”제18대 대통령 선거 당시 제3차 TV토론 중 관련 내용”]

△박=(전략) 아까 국정원 여직원에 대해서는, 국정원 여직원는 증거 다 내놨다. 컴퓨터고 뭐고… 그런데 댓글 달았다고 해서 차까지 들이받아서 주소까지 알아내고, 그래 놓고서 여직원 나오지 못하게 2박 3일 감금하고, 이런 부분은 결과 어찌 됐든 이게 아무 문제 없다고 생각하나?

△문=박근혜 후보가 왜 여직원 두둔하나? 그분은 피의자예요.

△박=여성이든 남성이든 차를 들이받아서까지 주소 알아내고 감금하고 부모 못 만나게 하는 것 자체는 인권침해가 아니냐?

△문=바깥에서 문을 열어달라고 요청한 사람이 경찰관이다. 그게 무슨 감금인가. 사실관계를 제대로 파악해보셔야 한다.

△박=아이고(웃음)…그렇게 드러난 사실까지 아니라고 하면 할 말이 없다.

△문=수사 중인 사건에 대해서 사실관계를 마구 단정하면 안 된다. 수사 오도하는 것이다.

△박=그 댓글에 대해서도 댓글을 달았다고 막 그런 식으로 해놓고, 증거 못 내놓고 있는 거 아니냐. 캡처를 할 수도 있는 건데, 그것도 못 내놓고 있으면서… 그렇게 자꾸 어거지로 말씀하시면…

△문=그 사실관계를 수사 중에 있는 것이다. 그 증거를 민주당이 내놓을 사건이 아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 아니라고 단정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곧 드러날 것이다.

△박=국민이 판단을 하실 거라고 본다.

[/box]

하지만 더 많은 증거와 사례가 드러난 지금, 박근혜 대통령은 여전히 입을 열지 않고 있다. (추가 증거가 대량으로 드러나기 전인 2013년 8월 26일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지난 선거 때 국정원으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은 적 없다”고 한 적이 있긴 하다)

추가 증거가 대량으로 발견되기 전에는 그나마 한마디 하긴 했다

이 와중에 정작 답해야 할 사람을 대신해 이야기를 꺼낸 사람이 있다. 바로 국무총리다. 정홍원 국무총리는 2013년 10월 28일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했다. 이 담화문은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 박근혜 정부는 경제 활성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 그런데 현재 국정원 댓글과 NLL 의혹 등으로 혼란과 대립이 발생하고 있어 안타깝다. 일련의 의혹에 대해 실체와 원인을 밝히겠다.
  • 경제를 살리기 위해 국회(야당)와 정부의 협력이 필요하다. 경제계와 노동계도 도와달라.

담화문 전문을 가만히 읽다 보면 이 담화문의 전반적인 내용은 박근혜 대통령이 직접 발표해야 더 어울리는 내용이다.

국정원 정치 개입 사건의 진상 파악 과정에서 채동욱 검찰총장 사퇴, 윤석열 특별수사팀장 수사팀 배제, 제1야당의 장외투쟁 등 굵직굵직한 일들이 벌어졌고, 대규모 촛불집회가 매주 열리고 있으며, 재외교민들까지 대통령 방문에 맞춰 집회를 연다고 하는 이 시점이다. 어느 때보다 대통령의 책임 있는 말 한마디가 중요한 시점이다. 하지만 대통령은 입을 다물고, 국무총리가 대신 총알받이로 나선다. 정홍원 국무총리가 박근혜 대통령의 ‘카게무샤’를 자처하여 대신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했다고 봐도 크게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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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재외국민이 제작한 [박근혜 ‘댓’통령 환영 촛불집회] 포스터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 이후에 국정원 사건과 관련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아직 확인된 바 없다. 심지어 검찰에 의해 국정원의 대선 개입 사례가 더 많이 밝혀진 이후 대통령이 매일 월요일 주재하는 수석비서관회의조차 벌써 4주째 열리지 않고 있으니 대통령이 이 사안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청와대 차원에서 어떤 대책을 마련하고 있는지, 앞으로 현 정국을 어떻게 운영할 것인지는 그야말로 아무도 모르는 ‘밀실’ 속에 갇혀 있는 셈이다.

책임자 없는 박근혜 정부의 밀실 정치

‘소통’이란 단어가 유행가 가사 마냥 흔하게 쓰이는 시대다. 하지만 이번 정부가 보여주는 몇몇 장면들은 소통 이전에 의사결정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누가 그 결정에 책임을 지는지부터 명확히 해야 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정부 안에서 일하는 누군가는 선출직이고, 또 누군가는 선출된 사람이 임명한 사람들이다. 선출직이든 임명직이든 자신의 업무 범위 내에서 일해야 한다. 자신의 권한 내에서 책임지고 일해야 하며, 그 과정은 국민들에게 가급적 투명하게 알려야 한다.

대통령은 왕이 아니고, 국무총리는 카게무샤가 아니며, 장관은 앵무새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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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댓글

  1. 큰일이다 ..저런정신들로 나라를 맡다니 .무책임도 이렇게 정신나간 무책임이 어딨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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