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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x type=”note”]슬로우뉴스가 가로수길서점과 제휴하여 좋은 책과 함께 매주 독자를 찾아갑니다. 가로수길서점은 “가로수길에서의 책 한 권”를 더불어 나누고자 2012년 7월에 문을 연 온라인 공간입니다. (편집자) [/b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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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아니면 올해 초쯤 TV를 시청하다가 ‘잉여 춤’이란 것을 보게 됐어요. 저게 무슨 춤인가 싶어 누군가의 말처럼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더군요. 익숙한 듯 낯선 단어, ‘잉여’. 찾아보니 ‘다 쓰고 난 나머지’란 뜻이었는데요. 그 후로 잉여란 말은 점점 더 자주 귀에 들어왔지만, 그저 잠깐 유행하는 말이겠거니 하며 그닥 신경 쓰지 않았어요. 하지만 ‘잉여 사회’란 이 책의 제목을 보는 순간 묘한 끌림에 집어들게 되어버렸죠.

읽다 보니 저 역시, 얼마 전까지 취업을 하지 못해 책 속 표현처럼 ‘우리들의 시대에 가장 대중적이고 절박한 문학의 형식인 자기소개서’를 쓰고 절 뽑아 줄 곳은 없나 헤매던, 우리 사회의 ‘잉여’였더군요. ‘우리들은 잉여다. 그리고 우리들은 가능성이다.’라고 말하는 저자 최태섭님의 궁금했지만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던 이 시대의 ‘잉여’들의 이야기를 이 책을 통해서 만나보시면 어떨까요.

남아도는 인생들을 위한 사회학, “잉여 사회”. 저자 소개부터 시작합니다.

이 책의 저자 최태섭은 현실에 순응할지 꿈을 좇을지 묻는 이들에게 ‘어차피 뭘 해도 망하니까 하고 싶은 걸 하라’고 조언하는 문화평론가다. 우연한 기회로 글을 쓰기 시작한 그는 결국 글쟁이의 운명을 받아들였다. “딴지일보”, “경향신문”, “프레시안”, “자음과모음R”, “한겨레”, “나·들”, “당비의 생각”(온라인), 남녀불꽃노동당, 팀블로그 리트머스를 비롯한 다양한 매체에 글을 기고하고 있으며, CBS라디오 <김미화의 여러분>에서 짧은 코너를 진행하기도 했다.

2011년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라는 책을 통해 청춘에게 강요된 열정이라는 형태의 불합리한 노동을 탐구했고, 이러한 착취와 소외가 더 이상 세대론만으로 설명되지 않음을 깨닫고 ‘잉여’라는 보다 큰 존재 방식을 사회학적 방법론으로 추적했다.

성공회대 사회학과 박사과정을 밟고 있으며 “어차피 뭘 해도 안 되니 하고 싶은 것을 하자”는 말을 인생의 북극성으로 삼고 있다. 장래희망은 먹고사는 것이다. 지은 책으로는 공저로 “우파의 불만”, “트위터, 그 140자 평등주의”가 있고, 저서로는 “잉여사회”를 펴냈다. 한국 사회에서 나타나는 자본주의, 노동, 젠더, 문화적 현상들에 관심을 두고 있다.

이 책을 볼까말까. 좀 더 자세히 이 책을 살펴볼까요? ‘오늘의 책 미리 읽기’,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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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age. 59 자유가 너희를 속박케 하리라

그러나 우리가 맞이한 것은 이상한 결론이었다. 일의 괴로움과 고달픔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취미와 적성을 일로 만든 이들은 이제 자신의 취미와 적성에서 괴로움과 고달픔을 느꼈다. 한 개인의 감수성과 개성, 소통 능력 같은 것들이 곱게 갈려져 일과 직업이라는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갔다. 하고 싶은 일을 한다면 열악한 대우 정도는 괜찮지 않느냐는 주객전도의 논리도 등장했다. 과거의 희생에는 그들이 뭔가의 거대한 이념을 위해서 헌신하고 있다는 가상의 만족감이라도 있었지만, 새로운 시대의 고달품은 이 모든 것이 네가 선택한 것이고 너를 위한 것이라는 것 말고는 아무런 이유를 알려주지 않았다. 결국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는 ‘자본주의의 얼굴을 한 삶’이라는 모습으로 돌아왔다. 이제 놀이는 그것이 어떤 능력을 계발하고 함양할 때에만 그 존재를 읹정받을 수 있다. 인성과 친교도 무형의 자산 목록으로 쳐준다. 영양소와 칼로리를 계량한 음식을 먹으며 칼로리 소모량을 계산한 운동을 하고, 섹스와 연애 역시 손익과 공학적인 분할법을 이용해서 얼마든지 계산할 수 있다. 사람들은 혹시 내가 손해를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낭비를 하고 있지는 않은지를 고민하며 단 한순간도 마음을 놓지 못한다. 자연과 신, 기계와 또 다른 인간으로부터 자유로기 위해 우리가 벌이는 모든 투쟁은 우리를 더더욱 어떤 부자유로 몰아대고, 자꾸만 억울한 기분이 치솟는 것을 간신히 억누르며 우리는 자유라는 이름 아래 오늘날의 삶을 받아들여야만 하게 된 것이다.

Page.95 좀비와 유령의 존재론

원래의 좀비는 부두교의 사제인 보커에 의해 영혼을 빼앗긴 자의 육신이 노예로 쓰인 데서 유래한 것이다. 즉좀비는 반란을 일으키지도 않고 돈을 줄 필요도 없는 부리기 쉬운 노예였던 것이다. 그러나 로메로에 의해 재탄생된 좀비들은 각각의 개채델은 약하지만 그 어마어마한 숫자로 인해 절대로 물리칠 수 없는 존재이다. (중략) 하지만 이런 좀비 코드의 ‘실현 가능한’형태는 에드거 라이트의 영화 <새벽의 황당한 저주>가 보여주는 블랙코미디에 가장 가까울 것 같다. 버스를 기다리는 노동자들, 반쯤 감은 눈으로 일을 하고 있는 마트의 계산원들, 할 일 없이 어슬렁거리는 동네 청년들의 모습을 보여주며 시작하는 이 영화는 딱히 강하지도, 머리가 좋지도 않고오히려 머저리에 가까운 가전제품 판매원이 숀이 갑자기 런던을 뒤덮은 좀비 떼로부터 살아남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이야기는 주인공의 면모에 맞게 각자의 찌질함과 나약함을 드러내며 허우적거리는 인간들의 면모를 코믹하게 그려낸다. 이 중에서도 가장 흥미로운 것은 엔딩에서 사태가 수습된 뒤 주인공이 보틑 TV 화면들이다. 정부는 좀비를 모두 죽이지는 않고(그들은 이미 죽었지만!) ‘무력화’시켰다. 무력화된 좀비들은 TV 쇼의 훌륭한 소재가 되는 한편, 약간의 보호용 구속구만 착용시키면 단순노동에 매우 적합한 존재라는 것도 확인되었다. 오프닝에 등장했던 노동자들의 자리는 이제 구속구를 착용한 좀비들로 대체되었는데, 노동자들과 좀비의 모습은 완벽하게 똑같다. 오프닝과 엔딩을 대비시키며 영화는 이미 누가 좀비고 누가 인간인지 구분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대체 매일같이 피곤에 찌들고 시키는 대로 일하면서 쥐꼬리만 한 돈을 받아 먹고살겠다고 발버둥 치는 우리 말고 누가 좀비인가?

Page. 121 잉여 추방을 위한 시공간

이 기준에 맞춰 재편되는 시공간의 성격은 과거 서울시에서 벌어진 ‘디자인 서울’과 같은 ‘미학적’인 행정 프로젝트에서 잘 드러난다. ‘21세기는 감성을 파는 디자인의 시대’이며 ‘누구나 한번 찾고 싶은 관광도시, 가장 살고 싶은 명품도시’를 만들기 위해 진행되는 이 행정 프로젝트는 “디자인은 인간과 자연을 기본으로 효율성과 인간의 따뜻한 마음을 전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안전과도 결부된 종합적인 문화입니다.”라고 디자인을 정의하고 있다. 이 정의에서 디자인이라는 미학적인 프로젝트는 효율성과 안전이라는 또 다른 차원과 강력하게 결부되어 있다. 그리고 이 프로젝트의 핵심 사업 중 하나가 ‘노점상 단속’이라는 것은 이 프로젝트가 가진 성격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안전하고 효율적인 공간, 즉 합리적으로 정돈되어 있는 공간을 구성하기 위해서 그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비합리적인 요소들을 퇴거시키는 방식의 ‘디자인’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즉 여기에는 앞서 바우만이 말했던 ‘쓰레기 처리’가 ‘21세기는 감성을 파는 디자인의 시대’라는 슬로건 아래 행해지고 있다. 다시 말해 이제 추방을 결정하는 것은 그가 지은 죄가 아니라, 더 좋은 것들을 위해서, 아름답고 깨끗한 도시나 더 많은 휴식 공간이나 더 많은 관광 수익 같은 것들에 의해서 결정되고 이루어지는 것이다.

Page. 150 이말년과 귀귀, 부조리와 검열의 이중주

이 동맹의 구성은 대략 다음과 같다. 먼저 ‘보수적인 종교단체’들은 종교적인 이유로 현대의 모든 문화적 자유와 성전을 벌이는 집단이다. ‘학부모들’은 매체가 자신의 자녀에게도 악영향(즉 성적 하락)을 미칠지 모른다는 불안에 휩싸여 검열을 주장하거나 승인한다. ‘언론’은 선정주의적인 보도를 통해 매체의 위해성을 부풀리고 그런 보도를 통해 시청률이나 조회수 같은 곳에서 이득을 얻는다. ‘검열 당국’은 검열의 범위를 더 확대하고 그를 통해 조달될 자금과 영향력을 얻으려고 한다. 마지막으로 ‘권력’은 자신의 실책이나 책임을 면피하고, 오히려 이를 기회 삼아 더 많은 구너한을 얻고자 한다. 물론 매체나 문화산업이 ‘순결한 피해자’인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이런 구성 형태가 나아갈 거의 명확한 방향은 ‘그 대상을 누가 어떻게 왜 정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빠져 있는 검열의 강화이고, 그것을 통해 벌어지는 사태는 표현과 언론의 자유의 심각한 왜곡과 그로 인해 부메랑처럼 돌아올 도덕적 공안정국이다. 그리고 귀귀의 기괴한 만화를 비롯한 수많은 잉여적인 것들은 그것의 문제를 실질적으로 검증받기도 전에 검열과 처벌의 대상이 되었다. 병맛처럼 이해할 수 없거나, 박정근처럼 ‘성스러운 악’ 북한을 함부로 건드리며 놀았거나, G20 포스터에 감히 취그림을 그려 넣었거나······. 오늘날 세심한 권력이 악플이나 달면서 이런 세세한 것에까지 간섭하는 불관용의 태도를 갖게 된 것은 불안을 빌미로 한 우리들의 침묵과의 분명한 공모 관계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런 검열들에 대한 제대로 된 대결 지점을 찾지 못하면 이기든 지든 검열자들에게 유리한 결과로 귀결되는 소모적인 싸움이 계속되는 것이다.

Page. 247 ‘민주화 당한’ 세계가 보내는 위험 신호

어쨌거나 이들이 싫든 좋든 이미 세계는 ‘민주화 당해’다. 권력의 작동 방식이 변했고, 그것은 불만족스러우나마 제어와 한계의 요소들을 동반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의 ‘권력의 적’에 대한 생각은 지금 다른 이들이 일베를 바라보는 것과 똑같은 방식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즉 그들이 생각하는 그런 좌파는 존재하지 않으며, 심지어는 이념도 이미 팔려 간지 오래라는 것이다. 만에 하나 일베의 소원대로 광주가 폭동으로 재정의된다고 해도, 그것이 일베의 회원들에게 가져다줄 이득은 하나도 없다. 그들이 희생자와 유족들의 절규를 들으며 즐거워할 수는 있겠지만, 이들의 근본적인 불안과 불만에는 조금의 영향도 주지 못할 것이다. 이들은 결국 모든 세게가 나처럼 불행해질 때까지 멈추지 않는 암흑의 행군을 계속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 행렬의 끝에는 결국 모든 것의 원인으로서의 나와의 공포스러운 대면만이 기다리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마냥 마음을 놓고 이들을 비웃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들이 빠진 함정은 지금 우리도 함께 빠져 있는 함정이다. 일베가 아닌 모든 이들도 불안과 불만을 양손에 가득 쥐고 있다. 이들의 행동 역시 이 ‘영원한 현재’를 벗어나기 위한 궁여지책의 하나일 뿐이다. 나머지들이라고 별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어서, 일베와 우리 사이네는 ‘넘사벽’이 아니라 실개천이 놓여 있을 뿐이다.

볼까말까 이 책!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의 감상은 어떨까요? SNS상 독자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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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군 님 : ‘잉여’라는 단어가, 교과에서나 만났던 그것이 언제부터 우리 곁에서 이리도 친숙하게 존재했었던가. 나는 종종 그것이 궁금했다. 정말 그것이 궁금해서, 굳이 거창하게 붙이자면 잉여의 탄생과 역사가 궁금해서 이런 저런 책들을 살펴봤다. 대체로, 만족스럽지 않았다. 잉여를 말한다고 하는데, 갑자기 으랏차차, 청춘!, 하는 그런 외침이 들려 당황하기도.’사람들이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것, “너희들이 진짜 잉여냐”라는 물음에 이토록 힘을 쏟는 이유는, 막연한 불안감의 실체를 마주하고 나와 그것 사이에 명확한 선을 긋고자 하는 소망 때문이다.’ 최태섭의 <잉여 사회>를 읽었다. 내가 궁금했던 것이 있을까 했는데, 있었다. 아주 궁금증을 팍팍- 풀어줬다. 이 책은 한국사회에서 잉여가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그만의 관점으로 이야기하는데 명쾌했다. 또한 유쾌했고 날카로웠다. 읽는 동안 몇 번이나, 헉! 했고 우와! 했다. 작은 틈으로, 큰 것을 본 느낌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정말 놀란 건, 내가 진심으로 감탄한 건, 잉여를 자본주의를 중심으로 좀비, 혹은 유령 같은 존재로 설명하는 말씀과 그들을 둘러싼 사회적인 이야기들을 허를 찌르며 이야기했다는 것, 또한 잉여들에게 생존하라는 그 일갈, 나아가 잉여의 관점을 완전히 새롭게 바라보게 해준다는 것이다.

Soyeon Bae 님 : 도대체 이 사람들 왜 이러지? 싶은 현상들에 대해서 내가 생각치 못했던 이유를 알게 해 준 ‘잉여사회’. 개인과 사회는 밀접히 닿아있다는 말을 다시 실감했다. 지금으로선 더 나아지겠지 생각하며 나의 오늘을 살아가는 수 밖에.

동네청년 님 : 거대 서사나 역사적 소명 같은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근거 없는 존재’이고, 세계는 우리에게 ‘알아서 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거대한 막연함은 우리를 ‘잉여’라는, 피할 수 없는 시작 지점으로 인도한다. 『잉여사회』중

조제 님 : 아무리 발버둥쳐도 지금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 달 벌어 그 달 살고, 10년 후가 어찌 될지 상상도 못하겠는, 그나마 이 불황에 벌어먹고 산다는 걸 다행으로나 여겨야 하는 상황. 그렇기에 긍정이니 도전 같은 소리를 들으면 짜증부터 나고, 청춘이라는 말에도 신물이 나는 상황. 이 책은 지금 한국에 사는 내가 왜 이런 기분이 드는 상황에 처했는지를 잘 설명하고 있는 책이다. 외국의 어느 유명한 사회학자가 쓴 책이 아니라, 한국의 젊은 작가가 쓴 책이기에 더욱 공감할 수 있었다. 특히 88만원 세대나 20대 개새끼론 같은 청년담론에 대한 이야기가 상당히 공감된다. 정작 젊은이들은 빠져 있고 어른들의 논평만 넘쳐나는… 결국 자기가 잉여라는 걸 똑똑히 알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전혀 상황 파악을 못한 채 꼰대질을 하고 있는 기성세대들에게 일침을 놓고 있다. 표지는 발랄한 느낌이지만, 단순하게 인터넷 현상만 분석하거나 ‘톡톡 튀는’(이 말도 이제 역겹다!) 문장으로만 채워놓은 책은 아니다. 제법 무게 있고 체계적으로 우리 사회를 분석하고 있다. 2부에서는 인터넷의 잉여 현상들의 계보를 쭉 분석하고 있는데, 그것만으로도 상당한 정보다. 특히 ‘병맛’이 새로운 ‘서사’라는 내용이 참신하게 다가왔다. 긍정이나 도전 같은 말에 질린 사람들에게 머리를 상쾌하게 만들어주는 책으로 추천하고 싶다. ‘도대체 쟤네는 왜 저러는지’ 궁금한 어른들(자신들은 그닥 잉여라는 말에 공감 못할 수도 있지만!)도 읽어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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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발견하고 후루룩 훑어볼 때는 킬링 타임으로 읽기에도 좋은 책이겠구나 싶었어요. 위트 있는 말솜씨로 보는 중간중간 웃음이 빵빵 터지기도 했거든요. 하지만 다른 분의 리뷰처럼 읽다 보니 헉! 하고 놀라고 우와! 하며 감탄했습니다. 사회에 대한 별다른 관심 없이 그저 보이는 것만을 믿으며 그러려니 했던 저를 반성하기도 했구요.

상처받고 곪은 사람들이 넘쳐나는 이곳에서, 우리가 정말 잉여일지는 몰라도 그저 그렇게 흘러가게 두는 잉여 인생은 아니었음 좋겠어요. 작가의 말처럼 그냥 살아남는 게 아니라 ‘잘’ 살아남고 이 처절한 생존 투쟁의 와중에도 성장하는 법을 배우고, 또 성장하는 삶이길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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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게재본은 가로수길서점 원문을 일부 수정했습니다. [/b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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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댓글

  1. 그냥 아무렇지 않게 읽어 넘겨지는 디자인 표어도 생각을 하고, 맥락과 연결지어서 보면 이렇게 달라지는군요. 읽어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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