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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전쟁’의 서막: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 무엇이 문제인가

2013년 9월 23일, 정부는 새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으로 뉴라이트 경향의 유영익 한동대 석좌교수를 내정했다. 석 달 전부터 내정설이 흘러나왔기 때문에 인선 자체가 놀랍지는 않다. 하지만 한국사 교과서 문제로 한창 시끄러운 때에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로 추켜세우는 인물을 국사편찬위원장에 앉힌 것은 정부가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이하 ‘교학사 교과서’) 파동에서 결코 쉽게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로 보인다. 이번 인선은 정부가 교학사 교과서의 근본 관점을 지지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교학사 교과서 저자들이 여러 사회적 논란에도 불구하고 출판을 강행하겠다는 입장을 밝히자 교과부는 ‘중립’을 가장하여, 즉, 8종 교과서 모두에 수정을 지시함으로써, 사실상 교학사 교과서를 편들고 있다. 이에 교학사를 뺀 나머지 7개 출판사 저자들이 “교과서 8종을 모두 재검토하는 것은 수많은 오류를 지적당한 교학사 교과서에 시간을 벌어주려는 특혜”라며 반발하자, 수정명령권 발동을 검토하겠다며 교학사 교과서를 학생들 사물함에 어떻게든 집어넣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참고: 경향신문, 서남수 장관 “저자들 수정 거부하면 수정명령권 검토”, 2013년 9월 16일).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 표지

가치 판단 배제해도 ‘총체적 부실’

8월 30일, 교학사 교과서를 포함한 8종 교과서의 검정 통과 소식이 발표되자 교학사 교과서를 둘러싸고 수많은 말이 흘러나왔다. ‘친일’, ‘역사 왜곡, ‘부적격’ 등등 역사 교과서라면 거리를 두어야 할 말들이 수식어로 선택되었다. 애초에 국사편찬위원회는 문제투성이인 교학사 교과서를 통과시켜서는 안 됐다. 가치판단은 차치하더라도 문제는 이루 헤아릴 수 없다.

1. 잘못된 사실관계

교과서 편집규정 상 문제, 예컨대 사실과 맞지 않는 서술이 100건 넘게 발견됐다. 한국역사연구회에서 지적한 단적인 사례를 보자.

“부여는 산과 언덕, 넓은 연못이 많아서 한반도 지역에서는 가장 넓고 평탄” (교학사 교과서 22쪽)

『후한서』 등 사료를 보면 부여가 한반도에 있었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교과서는 교학사 교과서가 유일하다.

2. 출처 불명 이미지 사용

이명희 교수
(출처: 공주사범대)

교과서 집필의 기본 원칙도 지켜지지 않았다. 출처가 불분명한 이미지 자료를 대거 사용한 것이다. 김태년 의원 발표에 따르면 교학사 교과서가 인용한 사진 561개 중 327개의 출처가 포털이었다. 교학사 교과서 필자 중 한 명인 이명희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자료의 출처로 신뢰도를 판단하는 건 무리”라며 “역사를 공부한 사람으로서 자료를 보고 믿을 만하다고 판단한다면 실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자료의 신뢰도를 판단할 때 출처는 당연히 고려대상이다.

3. 표절

직접적인 표절도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공식 화장품, 박가분’, ‘고종 독살설’, ‘조선 교육령’ 서술에서는 위키피디아 해당 항목을 거의 그대로 옮겨왔다. 위키피디아의 서술과 교학사 교과서의 서술을 기계음으로 읽어보니 일치율이 높았다는 얘기도 들린다. 이쯤 되면 총체적 부실이 맞다.

‘역사 전쟁’의 서막

도대체 왜 정부는 이토록 황당한 부실 교과서를 편드는 것일까? 그 원인은 결국 교과서가 가지는 사회적 영향력, 그리고 이를 둘러싼 서로 다른 사회세력의 대립이라는 관점에서 보아야 규명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교과서는 국가가 인정하는 역사서술이다. 이 교과서는 격동의 한반도에서 벌어졌던 수많은 비극, 민주주의를 향한 투쟁, 그리고 그에 따른 성취물들을 국가의 공인 하에 우파들의 관점에서 체계적으로 대중을 향해 이해시키려는 시도다.

새누리당 김무성 의원이 표현했듯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은 “역사 전쟁”의 서막이다. 우리의 과거를 어떻게 이해하고, 이에 근거해 현재를 어떻게 평가할 것이며, 어떤 미래를 좇을 것인가의 문제를 두고 벌어지는 이데올로기 투쟁인 것이다. 따라서 지금의 교과서 파동을 이해하고 대처할 때 해당 교과서의 이런저런 부실함을 알리며 문제를 환기하려는 노력도 물론 필요하겠지만, 그와 동시에 더 근본적인 문제들에도 접근해야 한다.

이 글은 먼저 1) 교학사 교과서가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기까지의 과정을 살핀다. 그다음 2) 교과서 집필진들이 공유하는 역사관을 분석하고, 3) 이들의 논리적 근거인 식민지 근대화론을 둘러싼 논점을 짚는다. 4) 이 과정을 통해 이들이 진정으로 겨냥하는 표적이 무엇인지 규명하고, 5) 이들의 관점이 한국의 통치 권력에 활용되는 방식을 살펴본다. 6) 마지막으로 지금까지의 논의를 바탕으로 교과서 문제의 향후 전망과 과제를 제시한다. (주1)

좌파와의 "역사 전쟁"을 선언한 새누리당 김무성 의원  (C) KNN

좌파와의 “역사 전쟁”을 선언한 새누리당 김무성 의원
(C) KNN

교학사 교과서의 뿌리 ‘뉴라이트’

교학사 교과서를 흔히 ‘뉴라이트 교과서’라고도 부른다. 여기서 뉴라이트를 상세히 다룰 여유는 없지만, 적어도 학계에서 보였던 그들의 움직임을 다룰 필요는 있겠다. 교학사 교과서 집필을 주도한 인사는 뉴라이트이거나, 적어도 그들의 역사관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 앞으로 소급해도 무방하겠지만, 특히 노무현 정권기에는 정치와 사상의 양극화가 크게 진행되었다. 3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탄핵을 막아냈고, 우파의 의제가 좀처럼 사람들 사이에서 투과되지 못했다. 공안탄압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대중 사이에서 반공 이데올로기도 얼마간 희미해졌다. 이에 따라 우파들 중 학계와 종교계 인사들이 뭉쳐서 ‘무능한’ 기존의 우파들을 비난하는 세력들이 생겨났다.

2005년 11월에 창립된 뉴라이트전국연합은 뉴라이트가 수면 위로 떠오른 단체였다. 학계의 뉴라이트 인사들은 ‘대한민국 정통성’에 입각한 역사 새로쓰기를 시도했다. 이들은 민주화 세력을 자임하는 ‘좌 편향 세력들’, 특히 학계나 전교조, 정부 기구 등에 의해 잘못 서술된 역사를 학생들이 배우고 이에 따라 ‘잘못된’ 정치관과 세계관이 확산하고 있다고 보았다. 2006년 출간된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은 그런 문제의식을 담은 집단적인 첫 결과물이었다.

예전 뉴라이트전국연합 홈페이지 첫 화면 모습
(현재는 따로 홈페이지를 운영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안병직과 이영훈: 조직화 전부터 꾸준히 활동

뉴라이트라는 조직을 갖추기 전에도 이들은 학계에서 꾸준히 활동해왔다. 뉴라이트 학자들의 대부 격인 안병직은 80년대 말의 사회구성체 논쟁에서 남한 사회를 식민지 반봉건사회로 규정했을 정도로 전통적인 ‘민족사학’과 친화성이 높았다. [강철서신]을 통해 한국에 자생적 주체사상 지지자를 규합한 김영환이 지금은 종편에 출연해서 주체사상 지지자를 매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안병직은 소련 붕괴 이후 일본 유학을 통해 극적으로 전향했다. 한반도에는 조선 시대부터 근대로의 이행 동력이 없었다고 분석한 그는 평생의 연구과업으로 식민지 근대화론을 정당화하려 마음먹은 이영훈과 정치적 동지가 되었다.

이들은 민주화운동 세력 가운데 사회주의 전망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을 부정하려고 시도했다. 사회주의의 ‘실패’ 이후 이들은 자본주의의 성숙에 초점을 맞춰 역사를 재구성하려 했고, 사회주의 전망을 지닌 사람들을 시대에 뒤떨어진 이들로 여겼다. 게다가 남한의 자본주의가 더는 뒤지지 않을 정도로 성장하자 체제 친화적인 인사가 되었다. 60년대 장준하를 비롯한 우파 민족주의자들이 박정희의 군사쿠데타를 근대화의 계기로 여겨서 지지하거나 반대하지 않았던 것처럼, 소련이 붕괴한 90년대에 유사한 논리로 다시금 현실을 긍정했던 것이다.

뉴라이트가 바라본 기존 교과서

이들이 바라본 기존 교과서는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강조하고 군부독재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등 ‘국민통합’의 기제가 되지 못했고, 민족사를 강조하며 북한을 한민족의 범주로 포함하는 교과서의 논지는 대북관을 흐릴 염려가 있었다.

물론 뉴라이트 교과서도 고조선에서 서술이 시작된다. 이들도 교과서를 서술하는 단계에서는 한반도의 역사를 아울러야 한다는 점에서 민족사적 관점으로부터 아주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런데─뒤에 상세히 다루겠지만─이들이 민족사에 불편함을 느끼는 가장 결정적인 지점은 분단이다. 북한은 철저하게 실패한 국가고, 같은 민족으로서 통일해야 할 대상이라기보다는 남한의 자본축적을 위협하는 요인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공교육은 ‘국민 만들기’에 종속되어야 하므로, 역사교과서가 북한에 대한 모종의 긍정적 기억을 확대하고 재생산하는 기제로 쓰일지도 모르는 현실은 이들에겐 반드시 극복해야 할 대상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뉴라이트 전국연합이 창설되기도 전인 2005년 1월에 교과서포럼을 창립하여 활동했고, 2008년에는 자신들의 ‘대안교과서’를 출간했다. 그 뒤로도 계속하여 교과서의 ‘편향된’ 기술을 바로잡겠다고 나섰고, 결국 자신들의 독자적 교과서를 출판한 것이 이번 교학사 교과서다.

뉴라이트의 역사관: 대한민국 정통성론과 성장주의

지금은 고인이 된 김일영 교수의 저서 제목인 『건국과 부국』에서 단초를 찾아볼 수 있듯이 이들이 교과서에 투영시킨 역사관은 정치적으로는 ‘대한민국 정통성론’, 경제적으로는 ‘성장주의’로 요약할 수 있다.

‘대한민국 정통성론’은 남한에 정통성이 있다는 주장이다. 정통성은 무엇이며 어디에서 오는가? 뉴라이트가 말하는 정통성이란 역사 이래 가장 훌륭한 체제인―사실은 영미식 자본주의의 한 형태일 뿐인― ‘자유민주주의’ 그 자체다. 이들은 ‘정통성’을 논하기 위해 대한제국이나 상해 임시정부의 활동을 계보로 추적하는 일조차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 그들에게 역사적 맥락은 거세되어 있다. 뉴라이트가 구성하는 정치체로서의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의 완성 과정이며, 여기에 기여한 세력은 정통성이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은 세력은 모두 문제가 있다.

그런 맥락에서 그들은 일제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싸우던 수많은 좌·우파 세력들도 정통성 있는 ‘대한민국 건국세력’에 해당하는지 여부로 심판대에 올린다. 그 논리적 귀결로 독립운동 세력 중 가장 훌륭하다고 이들이 앞세우는 인물은 이승만이다. 이승만 세력이야말로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며 지금의 남한 체제건설(건국) 과정에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이번에 국사편찬위원장으로 내정된 유영익은 이런 연구경향을 주도해왔다. 이승만을 집중적으로 다룬 5권의 연구서를 출판했으며 이승만과 ‘대한민국 건국’을 주제로 학계에 발표한 논문은 10편이 넘는다.

반면, 이들의 역사관에서 건국 이후 당시 지배세력이 주창한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세력들은 국가가 극복해야 할 대상이다. 여순 반란 사건이나 제주 4·3의 희생자, 해방 후 남한에서 건국을 주도한 세력에 반대하여 활동한 좌파들이 모두 그런 범주에 들어가는 셈이다. 결국, 뉴라이트에게 한국현대사를 장식한 여러 개인의 활동과 사상은 남한 정부가 공표한 이념과 얼마나 들어맞느냐에 따라 평가될 뿐이며, 이는 반공이데올로기의 연장선에 있을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북한은 ‘자유민주주의’를 구현하지 않기 때문에 정통성이 없고, 따라서 극복과 배제의 대상이다. 2011년도에 교과서 안에 ‘자유민주주의’ 용어를 삽입해야 한다고 집요하게 주장했던 데에는 이런 맥락이 있다.

현대사의 질곡 탓에 문제는 조금 더 남아 있다. ‘자유민주주의’를 구현했다고 주장하기엔 다소 겸연쩍은 군사정권 30년의 존재를 해명해야 하는 것이다. ‘자유’와 ‘민주’를 말하며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을 받드는 이들이 여기서 독재 문제를 피해 가는 논리는 경제 성장이다. 경제발전이 한국인의 생활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다주었으며, 보릿고개에 허덕이던 대한민국을 부국으로 만든 업적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새로울 것은 없는 주장이지만, 이들은 여기에 ‘근대화’에 대한 나름의 인식을 덧씌운다.

이영훈은 근대화를 사회 전반의 과정으로 보며, 이전까지 한반도에 살던 이들에게는 근대화의 가능성이 없었다고 본다. 그에 따르면 일제의 식민지배를 통해 식민지라는 조건에서 근대화가 이뤄졌고, 이것을 발전시킨 것이 박정희 군사정권이다.

식민지 근대화론의 ‘논리’는 나름대로 합리성 있어 

이런 맥락에서 뉴라이트의 ‘경제 성장’ 역사관은 이번에 교학사 교과서가 전면적으로 제기한 식민지 근대화론과 접점을 가진다. 식민사관을 극복하려던 한국사학계의 연구방향을 생각한다면 뉴라이트와 기존 사학계가 극명하게 충돌하리라는 것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사실 식민지 근대화라는 학설 자체에는 나름의 합리성도 있다.

식민지가 된 조선을 자신들의 의도대로 다스리기 위해서라도 일제는 자신들에게 익숙한 장치들을 이식하거나 고안해야 했다. 그리고 그것들은 대체로 사람들의 삶을 적잖게 바꿔놓았다. ‘본토’에 필요한 쌀을 생산하기 위해 조선의 생산량은 증식되어야 했으며, 전시물자를 감당하기 위해 한반도 북부에는 여러 공장들이 세워졌다. 그에 따라 대규모 발전시설도 마련되었고, 전기가 확산하기 시작했다. 신작로라고 불리는 도로가 새로 닦였고, 수도가 공급되었다.

이 변화는 단지 물질적 변화에 그치지 않았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근대적 시간의 도입을 꼽을 수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시간’은 조선 시대에는 전혀 익숙한 개념이 아니었다. 근대적 시간은 노동력의 효율적 통제를 위해서도 필요했고, 각종 사회자원의 효율적 배치를 위해서도 필요했다. 그리고 위의 이런 변화들이 포괄적으로 개별 개인들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사람들의 집단적인 의식도 점차 바뀌었다. 이런 변화가 사람들의 삶을 중요하게 변화시켰다고 평가하는 수준이라면, 학술 가치를 인정할 수 있다. 한반도에서 식민지 근대화라는 굴절된 방식의 근대화가 진행되었고, 식민지배가 사회구성체가 달라진 계기였다고 본다면 나름의 설득력을 갖추고 있는 논리다.

식민지 근대화론을 골자로 하는 뉴라이트 [대안교과서]

식민지 근대화론을 골자로 하는 뉴라이트 [대안교과서]

문제는 식민지 근대화론에 담긴 ‘함의’

문제는 식민지 근대화론의 함의다. 먼저 이론적인 쟁점부터 살펴보자. 식민지 근대화론이 바라보는 근대란 서유럽 일부 지역에서 달성한 ‘근대’를 세계사 전반에 적용한 것이다. 이영훈 자신도 이를 숨기지 않는다. 그가 근대화의 특질로 꼽는 다섯 가지는 다음과 같다.

  1. 전통산업인 농업으로부터 공업의 분리
  2. 배타적인 사적 토지소유의 성립
  3. 종교로부터 자립적인 합리적인 개인의 분리
  4. 경제와 정치의 분리, 사회와 국가의 분리라는 근대 고유의 이원적 국제(國制)원리 성립
  5. 이와 같은 체제의 세계적인 수립이다. (주2)

‘1’부터 ‘4’까지는 서유럽의 특정 지역에서의 현상이고, ‘5’는 제국주의다. 이영훈의 논지를 따르자면 서유럽 특정 지역에서 나타난 현상이 제국주의를 업고 세계적으로 확산하는 것이 곧 근대화다. 이 논문에서 식민지 이전의 조선사회를 분석한 이영훈은 두 가지 점에서 조선이 자력으로 근대로 이행할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지주와 부르주아의 권력형성은 광무개혁을 통한 군주전제 체제의 수립으로 불가능해졌고, 농민들의 ‘평균주의적 요구’에 국가가 순응함으로써 근대로의 이행동력을 상실했다고 보는 것이다.

광무개혁의 성격문제, 더 나아가 군주전제 체제와 자본주의 이행의 상관관계는 차치하더라도, 농민들의 저항이 근대 이행을 가로막았다고 본다면 애초에 저항을 통한 이행의 가능성은 차단된다. 서양에서 자본주의 이행을 가능하게 했던 수많은 대중저항은 도외시한 채 저런 식으로 문제를 설정한다면,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으로 기억되는 민주화운동에 대해서도 역사의식의 근간에서부터 적대적일 수밖에 없다. 민중의 저항이 역사발전을 제약하는 요소로 취급되기 때문이다.

우승열패 적자생존의 세계관

조선 사회의 근대적 이행 가능성을 부정하는 이런 이론의 또 다른 결과는 우승열패의 세계관이다. 조선이 자력으로 근대화할 수 없었다면,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의 지배를 받은 것은 어떻게 봐야 할까? 이는 역사의 필연인가? 뉴라이트는 이 문제에 대한 분명한 답변을 회피하면서, 그저 식민지배가 근대화에 도움을 준 측면이 있다고만 말한다. 그들의 역사관에서 일제 지배에 대한 비판은 강조되지 않는다. 식민지배의 원인이 된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야만도 비판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야만에 일찍 뛰어들지 못한 것이 비판의 대상이다.

그러다 보니 이영훈이 일본군 성 노예로 끌려갔던 할머니들을 향해 “자발적 성매매”를 운운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현실이 야만적이라고 해서 지향점까지 야만적일 필요는 없는데, 현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이들은 이 둘을 의도적으로 섞는다. 이들이 보는 ‘민중’이란 사회 변화에 쉽사리 발맞추지 못하는 보수적 집단이다. 그래서 근대의 ‘선각자’들이 나서야 하는데, 이에 성공한 국가가 뒤처진 국가를 지배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들의 세계관과 역사관이 위로부터의 시각을 넘어서 영웅 사관에 가까운 이유다.

자체적인 이행이 불가능한 조선에 필요한 것은 자본주의의 이식이었다. 식민지 지배는 내키지는 않지만 ‘엄밀히 실증’해봤을 때 손해 볼 것은 별로 없는 장사였다. 자본주의로의 이행 여부를 역사발전의 절대적 준거점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이들의 역사관에는 새로운 사회, 새로운 미래가 없다. 그저 현재의 자본주의가 영속하는 것이 과제일 뿐이다. 소련이 무너진 이후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성마르게 선언했던 ‘역사의 종말’을 21세기에 다시금 외치는 것이 뉴라이트의 역사관이다.

뉴라이트의 일차 표적 ‘민족주의 사학’  

사실 이런 식민지 근대화론을 통해 이영훈이 표적으로 삼은 것은 바로 ‘민족사’를 구조화하려는 한국사학계였다. 해방 이후 한국사학계는 민족주의를 토대로 ‘민족사’를 재구성하려 해왔다. 당시에는 식민사관 극복이 절실했기 때문에 연구역량이 시급히 축적되어야 했다(주3). 이를 극복하지 않고서는 독자적인 연구에 나설 수 없다는 위기의식이 있었던 것이다.

식민사관의 극복은 여러 방향에서 시도되었지만 큰 줄기는 내재적 이행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었다. 학계의 속성상, 연구자들의 관심분야는 서로 달랐지만, 연구목표는 식민사관의 전제인 정체성론과 타율성론을 극복한다는 점에서 비슷했고, 소위 내재적 발전은 학계의 보편적 상식이 되어갔다. 그리고 식민사관을 철저하게 극복하려던 연구자들의 의지는 민족주의를 발전시켰다.

그러다 보니 식민지배의 경험을 공유하는 북한까지 포괄하여 하나의 역사단위로 보는 데에도 큰 견해 차이가 없었다. 남북대립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정권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시선이 확산하였고, 이들이 쥔 권력은 친일 청산이라는 과제가 해결되지 않은 결과물로 인식되었다. 이에 따라 대체로 반일-반독재 성향이 강했으므로, 독재정권 하에서 된서리를 맞은 한국사 연구자들도 적지 않았다.

한반도의 역사가 내재적으로 발전했다는 데에는 합의가 있지만, 구체적인 동력을 어디서 찾느냐는 별개의 문제였다. 누군가는 지주제를 해체해가던 농민들의 저항에서, 다른 누군가는 상업활동을 늘려가며 부를 축적하던 상인들에게서, 또 다른 누군가는 사색당파 간의 견제와 균형에 입각한 ‘근대적 정치원리’에서 근대적인 요소들을 검출했다. 혹은 영•정조 시기를 성리학에 입각한 ‘계몽군주’ 시대로 보면서 위로부터의 근대화 가능성을 모색할 수도 있다. 내재적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한국사를 연구한다고 방향성과 계급성까지 같을 수는 없다(주4).

현대사학회 창립 기념 학술회의

이영훈을 위시한 뉴라이트 학자들에게는 민족사학 담론의 위와 같은 함의가 불만이었다. 그는 이런 연구들이 통합적 국민국가 수립에 장애가 된다고 인식했다. 좌파와 북한에는 호의적이고, 자유민주주의와 경제성장을 책임져온 정치세력에는 ‘친일파’, ’독재’, ’냉전세력’ 등 철퇴를 휘두르는 악의적인 역사관으로 보인 것이다. 이영훈은 민족주의 사학 연구를 비과학적이고 ‘정치적’인 동기에 종속되었다고 규정하고는, 자신은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것으로 자임했다. 그래서 그는 일찌감치 경영형 부농 등 한국사학계의 ‘자본주의 맹아론’을 논박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뉴라이트의 진정한 표적은 민주화운동의 정신 

한국사학계가 민족주의와 함께 대체로 공유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전제도 이영훈과 뉴라이트에게는 중요한 반박대상이었다. 한국의 현대사에서 대중이 스스로 주체가 되어 강고한 독재를 무너뜨렸다는 한국사학계 나름의 자부심과 공리는 단단하다. 설령 이 사회에서 냉전세력이 다시금 득세하더라도, 민주화운동의 경험이 강렬한 합의로 남아 있는 한국사학계의 이데올로기 지형은 전체 사회와는 다소 다를 것이다.

그러나 이영훈에게 민주화운동의 역할을 과장하는 것은 불편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경제성장을 주도한 국가권력의 공을 인정하지 않은 채, 그 권력을 끌어내린 민주화운동을 예찬하는 일은 공정성을 잃은 것이며, 경제발전 없는 민주주의라는 것은 의미가 퇴색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는 “한국의 민주주의 세력들이 과연 자유주의 세력이 맞느냐?”고까지 되묻는다.

이영훈은 한국사회에 “시민사회가 존재하지 않는다”며, “일단 군중이 모이면 진실과 실체는 애매해진다”고 주장했다. 그것도 모자라 “[2008년의] 촛불집회 같은 경우도 수입 쇠고기에 대해서 검증되지 않는 실체를 가지고 고도의 정치적 파장을 일으켰다”고 비판했다. 그에게 민주화란 통합적 국민국가 수립이라는 헌법적 가치, 그리고 이를 수행하는 국가를 부정하는 것과는 공존할 수 없다. 기실 한국의 민주화운동은 민주주의를 비틀어놓은 헌법과 국가권력에 맞서 싸운 과정이었는데도 말이다.

뉴라이트 인사들이 교과서를 통해 논박하려는 것은 바로 이런 민주화운동의 정신을 계승해야 한다는 견해다.

권희영 교수는 100분 토론에 출연하여 타 출판사의 교과서 집필자를 향해 “민중사관을 버리”라고 요구했지만, 사실 이들이 지칭하는 ‘민중사관’은 박헌영과 모택동이 외친 주의와 주장이라기보다 남한이 민주화운동을 거치면서 자생적으로 형성되어 확산한 의식이다. 부당한 국가권력에 맞서 오로지 아래로부터의 저항만이 사회진보를 가져올 수 있다는 믿음 말이다. 일제하 한인 사회주의자들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던 권희영 교수가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자신의 연구부터 진지하게 되돌아봐야 할 것이다.

뉴라이트의 후원자들

흥미롭게도 뉴라이트는 기존 한국사학계를 극복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자신을 탄압하는 주체로 상정하고 있다. 분명 학계에서는 뉴라이트의 목소리가 소수이긴 하지만 뉴라이트 사관을 공유하는 이들이 조직한 한국현대사학회가 전경련의 후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고려했을 때, 이 구도가 정직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반공 이데올로기가 강력하던 시절부터 민족사적 관점에서 통일을 지향하며 역사상을 재구성했던 기존 한국사학계는, 지배자들 입장에서 때로 활용할 여지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골치 아픈 존재였다. 반면 신자유주의의 확산으로 세계화 등의 담론이 활력을 얻으면서, 남한 자본가들의 이해관계에 합치되는 이데올로기는 민족사적 담론을 배제하던 일부 포스트모더니즘과 민족이 아닌 국가를 통합체의 최고 단위로 여겼던 뉴라이트였다.

자본과는 다소 다른 이유에서, 그 누구보다 박근혜도 일찍부터 뉴라이트 프로젝트에 친화적이었다. 이는 2008년 ‘대안교과서’ 출판기념회 축사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박근혜는 “청소년들이 왜곡된 역사 평가를 배우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전율하지 않을 수 없다”며 “뜻있는 이들이 현행 교과서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청소년들이 잘못된 역사관을 키우는 것을 크게 걱정했는데 이제 걱정을 덜게 됐다”고 안도했다. 사실 이 말은 소위 냉전 우파 모두의 필요와 정서를 대변한 말이었을 것이다.

물론 교학사 교과서의 문제점이 워낙 심각해서 최근에는 박근혜도 “교과서에 사실관계 잘못 없어야” 한다고 했지만, 박근혜의 행적을 고려한다면 저 말도 일종의 양비론적 물타기에 지나지 않는다. 교학사 교과서가 저지른 사실관계 오류와 여타 교과서의 “왜곡된 역사 평가” 모두 문제라는 것이니까 말이다.

정권수호 이데올로기로서의 역사 연구와 서술

사실 남한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가치는 민족주의가 아니다. 기본적으로 남한이라는 국가의 관심사는 지배집단 전체가 지키려는 이익을 관철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배층의 이익을 포장하고 관철하는 사상적 장치는 때에 따라 변해왔다. 이승만 집권기에는 ‘반공 이데올로기’이기도 했고, 박정희 집권기에는 이를 토대로 ‘한국식 민주주의’를 구축하기도 했으며, 김대중과 노무현 집권기에는 민주주의를 정치적 영역으로 한정시키는 것을 의미했다.

이 장치들은 정권에 저항하는 이들을 공격하는 도구였다. 이승만 정권은 자신에 반대하는 세력을 빨갱이로 몰아 처리했고, 박정희 때에도 반공이 국시인 가운데 민주화 인사들을 반민주 인사로 둔갑시켜 탄압했다. 김대중과 노무현 정권이 각종 민영화 반대 행동에 공권력을 투입했던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민주주의의 이념이 경제적 영역으로 확대될 때 가차 없이 탄압의 칼을 휘둘렀다.

역사 연구와 서술 역시 이런 차원에서 활용됐다. 민주화운동을 탄압했던 박정희와 전두환은 ‘국가를 수호한 역사’를 강조했다. 흔히 알려진 사례를 꼽자면 고려 무신정권 연구와 충무공 선양 사업 등을 들 수 있다. 반면 김대중•노무현은 자신을 정치적으로 성장시켰고 자신들의 지지 기반이기도 한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무시할 수 없었다. 군사정권이 저지른 온갖 국가폭력이 정부의 이름으로 인정된 것은 이 시기였다. 시간이 지나서 진실이 자연스레 인정된 것이 아니라, 남은 이들의 끊임없는 투쟁이 새로운 집권세력의 이해관계와 맞물려 인정된 것이다.

박근혜와 우파에게 뉴라이트 교과서가 반가운 이유

이런 방식의 역사 재구성이 십 년간 이뤄진 다음이다 보니 박근혜와 우파 세력은 뉴라이트 교과서에 반색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자신이 쥐고 있는 지배집단 내에서의 권위와 영향력의 원천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박근혜로서는 한국의 현대사를 더 철저하게 자신의 ‘진영논리’로 관철해야 할 이해관계가 있다. 이명박 정권 때에도 금성출판사 교과서 수정 파문과 자유민주주의 서술 파동 등 우파들의 ‘역사 새로쓰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역사관과 정치철학은 아버지에게 가장 크게 영향을 받았다고 공공연히 밝히는 박근혜가 이에 더 적극적일 것임은 자명하다.

박근혜는 대선 과정에서 인혁당 사건이 불거지자 “역사의 평가에 맡기자”고 주장했다. 돌이켜보니 그 말은 단지 정치적 회피이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을 옹호하는 일부 지식인들이 장차 학계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도록 지원하고, 이를 통해 인혁당 사건을 민주화운동의 시각 반대편에서 재평가하겠다는 야심 찬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날로 심화하는 경제위기는 역사 다시쓰기에 대한 우파의 조급증을 부추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경제위기는 평범한 사람들의 희생을 강요하고, 이는 불만과 저항을 낳는다. 군사정권의 생물학적 계승자가 청와대의 주인으로 군림하는 이상 경제위기에 따른 사람들의 불만은 그녀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거쳐 더 증폭될 것이다. 또 반대파들은자신을 군사독재에 항거한 민주화 세력의 계승자로 자리매김하며 지지를 결집하려 할 것이다. 우파에게 이는 어떤 의미에서도 달가운 상황이 아니다. 더구나 위기관리를 위해 공안 몰이로 사회분위기를 경색시키고 있는 정권으로서는 기존 한국사학계가 가지는 민족사적 관점이 북한에 대한 적대의식을 ‘희석’시킬 잠재적 위험이 있다는 것도 못마땅할 것이다.

박근혜로 상징되는 전통적 우파의 분파적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문제도 있다. 국가를 매개로 공유된 역사적 기억은 국가 내부의 결속을 강화한다. 최근 경제위기의 여파로 첨예해지는 동북아의 지정학적 불안정은 중국‧일본‧한국 사이의 관계를 조금씩 비틀면서 남북관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런 시기에는 일본의 우경화 바람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각 나라의 정권이 역사를 전면에 내세워 내부 단속을 시도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주5).

전망과 과제

대중의 공분으로 발행 포기 직전까지 몰렸지만…  

교학사 교과서 파동에 얹힌 이런 판돈을 보건대 이 문제가 쉽사리 종식되기 어려울 것이다. 유영익이 국사편찬위원장으로 내정된 사건은 정부의 의지가 몹시 강하다는 것을 방증한다. 뉴라이트는 새로운 역사쓰기를 중요한 장기적 사업으로 바라본다. 그들이 무엇보다 원하는 것은 역사교과서에서 민주화운동을 될 수 있으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만드는 것이다.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일치단결’하는 국민을 만들기 위해서는 민주화운동이 아니라 새마을운동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최종적으로 저들의 시도가 관철되느냐는 별개의 문제다. 한국 사회에서 대중운동의 경험으로 사람들에게 뿌리내린 민주주의에 대한 합의를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을뿐더러, 식민지 경험에서 유래한 민족주의 정서 역시 민족사학 담론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 무엇 하나 내세울 것이 없는 초라한 민주당도 “민주세력 집권의 역사”를 계속해서 쓰는 것을 자신들의 유일한 정체성이라 여기고 있으며, 한국사학계에서도 역량 있는 많은 학자가 뉴라이트에 반대하는 견해를 탄탄히 발전시키고 있다.

교학사 교과서 ‘부실’에 대해 초기부터 드러난 대중적 공분은 이런 역사 담론 내의 세력관계가 반영된, 뉴라이트와 그 지지자들에게는 예상치 못한 악재였을 것이다. 뉴라이트는 자신의 역량을 과대평가하는 한편, 자신을 둘러싼 반대자의 역량은 과소평가했다. 박근혜는 “교과서를 둘러싼 이념논쟁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이 문제를 ‘이념논쟁’으로 몰고 가려 했지만, 교과서를 둘러싼 논쟁의 초점은 결국 ‘부실’, 그것도 총체적 부실에 맞춰졌으니 말이다. 출판사는 이런 논란의 압력에 굴해 발행 포기 직전까지 내몰렸었다.

전열을 재정비하는 뉴라이트 

그러나 지금 뉴라이트 진영은 대열을 재정비하고 다시 도전적 공세를 계속할 태세다. 따라서 우리도 이 교과서가 통과되지 못하도록 사회적 압력을 더욱 강하게 가해야 한다. 이미 전교조에 소속되지 않은 역사교사 중 97.5%가 이 교과서를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는 설문조사 결과도 발표되었다. 학교 현장에서도 거부감이 있는 것이다. 8천 명에 가까운 교사들이 교학사 교과서의 검정취소를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고, 7개 출판사의 저자들도 교과부의 수정 요구를 거부하면서 수정 지시에 대한 법률적 조치를 강구하겠다고 밝힌 상태다.

한국역사연구회, 역사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 역사학연구소 등 4개 역사단체도 공동명의의 성명을 발표하여 검정취소를 요구했으며, 민주당도 교과서 대책위를 구성하고 마찬가지로 검정취소를 요구하면서 10월 국정감사의 주요 문제로 다루겠다고 밝혔다. 이런 힘을 더 효과적으로 결집해서 다른 7종의 교과서를 재검토하라는 부당한 ‘물타기’ 교육부 지시를 철회시켜야 하고, 교학사 교과서 검정 취소의 목소리도 더욱 높여야 한다.

배포 강행된다면 제2의 ‘후소샤’로 만들어야

채택률 10%를 목표로 썼지만 0.4%에 그쳐 일본 우파들의 흑역사가 된 2005년판 후소샤 역사교과서 표지

채택률 10%를 목표로 썼지만 0.4%에 그쳐 일본 우파들의 흑역사가 된 2005년판 후소샤 역사교과서 표지

설령 교학사 교과서가 우여곡절 끝에 배포된다고 하더라도 싸움은 끝난 것이 아니다. 식민지 근대화론자들과 달리 우리가 일본 역사에서 진정으로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교과서 우경화 반대 운동의 경험이다. 즉, 교학사를 제2의 후소샤로 만드는 것이다. 평화헌법 수정을 요구하면서 기존 일본의 사학계가 “자학사관”에 빠져있다고 비판했던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은 후소샤를 통해 교과서를 간행하는 일에는 성공했다. 그러나 그 교과서는 채택률이 0.04%(2001년), 나중에도 기껏해야 0.4%(2005년)에 그쳤고, 새역모는 이를 둘러싼 책임공방의 와중에 둘로 나뉘었다. 두 곳이 따로 교과서를 제출했던 2009년에도 둘을 합해서 채택률이 1.7%에 불과했다.

교학사 교과서는 일본의 사례를 한국에서도 발전시켜야 할 과제를 교사와 시민, 시민운동 세력에게 안겨주고 있다. 교과서 문제는 ‘상식’에 기대어 알아서 잘 해결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다. 만일 반대운동이 충분하지 않다면 문제투성이 교과서를 채택할 여러 사립학교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비록 교과서는 해당 과목 교사가 알아서 채택한다지만, 교장과 이사장이 교학사 책으로 정하자고 하는데 개별 선생님들이 저항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교학사 교과서의 부실함과 반민중성을 알리며 채택반대운동을 벌이는 일은 아무리 저 교과서가 엉망이라도 절실하게 필요하다.

학계 역할도 중요

향후 학계 역할도 중요하다. 학계는 뉴라이트와 이미 여러 차례 논쟁했던 경험이 있다. 식민지 근대화론은 사실 학계에서는 새로운 주장이 아니며 이를 논박하는 여러 논문들도 제출된 바 있다. 식민지 근대화론의 대두를 계기로 일제시기에 대한 실증적 연구도 여럿 축적되었다. 이 글에서 최근 연구동향을 자세히 소개하기도 어렵고 이를 완연히 소화하기도 어렵지만, 점차 민족이라는 날줄과 계급이라는 씨줄이 결합하여 근대성의 의미를 밝히는 가운데 다양한 사회적 영향으로 확대되어가는 추세로 보인다.

본래 역사학이 해야 할 일은 이론 정립 자체에 있다기보다 사료를 가지고 사건을 인과관계에 따라 재구성하여 역사 속에서의 의미를 밝히는 일이다. 즉, 역사 연구는 현재를 역사 발전의 최종 단계로 여기는 후쿠야마 부류의 발상과는 애초부터 거리를 두고 있다. ‘돈 안 되는’ 인문학을 위축시키려는 정부와 이런 현실을 긍정하라고 강요하는 뉴라이트의 광풍에 맞서서 연구역량을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학계에 주어진 과제일 것이다. 더구나 한국사학계에서 큰 돈을 쓰는 세 개 단체인 동북아역사재단(위원장 김학준), 한국학중앙연구원(위원장 이배용), 국사편찬위원회(위원장 내정자 유영익)가 모두 친정부, 친자본 인사로 채워진 만큼 연구역량을 발전시키는 것은 더더욱 절실한 과제가 되었다.

새 국사편찬위원장에 내정된 유영익 한동대 석좌교수   (C) KBS

새 국사편찬위원장에 내정된 유영익 한동대 석좌교수
(C) KBS

‘더 큰 싸움 더 큰 싸움 더 더 더 큰 싸움’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뉴라이트가 만일 이번 교과서를 발행하거나 보급하는 데 충분한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정교한 교과서나 더 체계적인 연구 성과를 들고 오리라는 점이다. 이번 검정 소동을 계기로 뉴라이트는 지금껏 한국사학계가 주도했던 한국사 교과서 집필에 정식으로 도전장을 내밀었다. 국민교육헌장 말미에 나온 결의에 충실했던지, ‘새 역사를 창조’했던 것이 이번에는 큰 문제가 됐다. 이들에게도 역사관이 있었지만, 이를 토대로 재구성할 수 있는 역사는 ‘대한민국사’ 외엔 없었다. 교과서가 기본적으로 대한민국 이전에 한반도에 있었던 국가들의 역사까지 서술 범위로 한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그러나─그들에게도 시간이 걸릴 테지만─한국사학계가 겪었던 좌충우돌에 비한다면, 지금 많은 자본과 정치적 지원을 등에 업은 뉴라이트 세력은 좀 더 압축적으로 자신의 오류를 보완할 가능성이 있다. 현재 논점은 ‘부실함’에 맞춰져 있다 하더라도, 앞으로도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 뉴라이트로서도 이번 일은 자신들에게 교훈이 될 것이다. 교과서 집필은 단순히 근현대사의 ‘왜곡’을 바로잡는 일과는 달리 자신들의 체계로 한국사 전반을 통사적으로 재구성해야 하는 작업이라는 중요한 사실을 체감한 계기였기 때문이다. 전장에서 적장이 멍청하다고 생각해서는 이길 수 없다. 언젠가는 정말로 ‘민주화의 가치’를 걸고 더 큰 싸움을 벌여야 할 시기가 올 것이다.

1. 방대한 주제를 짧게 쓰려다보니 세세한 인용표시는 하지 않았다. 글 말미에 참고한 자료들을 제시하는 것으로 이를 대신하려 한다.

2. 이영훈, 1996, 「한국사에 있어서 근대로의 이행과 특질」, 『경제사학』 21, 75~76쪽.

3. 정체성론, 타율성론, 일선동조론 등을 주된 내용으로 일제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한국사를 재구조화하려던 시도였다. 당대 내로라하는 일제의 관변학자들이 다수 동원되었던 프로젝트로,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는 이론적 체계가 정교하게 마련되어 있었다.

4. 예컨대, 근대로의 이행동력을 지배자들 바깥에서 본다면 대중저항의 사례를 보다 적극적으로 발굴하려는 노력을 경주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이행동력을 지배자들 내부에서(도) 찾는 경우에는 사회와 역사에서 대중 저항의 역할을 더 낮은 단계로 두곤 했다. 여기에 해당하는 사례가 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인 이태진일 것이다. 민주화운동의 성과로 87년 체제가 수립된 뒤, 그의 연구대상은 점차 고종으로 집중되어갔다. 고종의 근대화 노력을 재평가하고 그의 근대적 사고가 조선을 근대화로 이끌 수 있었다고 본 것이다. 영조와 정조를 유학적 계몽군주로 보았던 그로서는 자연스러운 사고의 발전이었다. 그렇게 본다면 이행동력은 철저히 위로부터, 그것도 군주 개인으로부터 발견된다.

반면 그의 제자들은 적잖게 민주화운동에 투신했거나 그에 친화적이었는데, 이는 그 당시 연구자들의 집단적 정서가 그랬기 때문일 것이다. (진보적인 연구 흐름의 결과 만들어진 학회가 한국역사연구회로, 지금 교학사 교과서에 맞서 학계에서 목소리를 활발히 내고 있는 그 곳이다.) 그는 2009년에 정년퇴임 앞두고 이런 “좌파 제자”들을 길러낸 것이 후회된다고 토로했다. 2011년에는 비록 눌변으로 인한 오해라고 해명하긴 했지만, 국회에서 “독재도 때에 따라 좀 필요할 수도 있는” 것이라는 발언도 남겼다. 그가 정치적으로 우경화한 것에는 다양한 이유-아마도 ‘민주정부’ 10년의 경험 등-가 있었겠지만, 그의 ‘위로부터의’ 연구 방향이 이런 변화를 더 쉽게 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또 그가 이번에 국편위원장으로서 교학사 교과서를 책임하에 검정한 것도 이런 맥락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그럼에도 남한의 현 집권세력은 이태진마저 결국에는 불편하게 여긴 듯하다. 이태진의 후임 국사편찬위원장으로 내정된 유영익은 오래 전부터 ‘이승만 재평가’를 주장하며 대한민국 정통성론을 주창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이승만은] 대한민국 건국에 절대적으로 공헌한 건국 대통령”이며 “이승만이 대한민국을 건국한 것은 하느님과 밤새도록 씨름한 끝에 드디어 하느님의 축복을 받아낸 야곱의 이야기를 연상시키는 위업”이다. 이런 인물을 인선한 것은 현 집권세력이 한국사학계 일부를 포섭해서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시도를 넘어 아예 자신들의 사상을 선전할 인물을 골랐다는 의미가 있다. 특히나 유영익은 초기 한미관계 연구에서 출발하여 이승만과 기독교 인사들 연구에 집중하다 지금의 역사관을 형성했던 터라 전통적 우파들이 견지하는 친미 이데올로기에도 더욱 친화적이다.

5. 그럼에도 한국의 정치와 경제를 지배하고 있는 이들이 뉴라이트 사관에 철저히 동조한다고만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뉴라이트가 국가와 민족을 구분하여 국가를 앞세운다는 사관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앞서도 밝혔지만, 대중동원의 이데올로기로서 국가주의보다는 민족주의가 더 낫다는 점은 지배자들에게 명백하기 때문이다. 국가주의에서는 국가가 전면에 나서야 하지만, 민족주의에서는 민족의 울타리 아래로 자신의 지위를 의제적으로 위치시킴으로써 계급적 본질을 숨기기에 더욱 쉽다.

더구나 독도와 ‘종군위안부’ 등의 반일 쟁점에서 대중 앞에 민족문제를 경시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없다. 한국의 지배자들더러 친일파의 후손이라 하더라도 대다수 대자본가들은 세계 시장에서 일본과 경쟁하고 있다는 점도 중요하다. 지배층에게 반일정서는 거스르기도 어렵고, 또 나름의 유용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친일 논리로 곧장 연결되는 식민지 근대화론까지 이들이 모두 뉴라이트와 공유하리라고 전제할 수는 없다. 물론 개중에는 ‘좌파들과 역사전쟁을 펼쳐야 한다’는 명목으로 ‘근현대 역사교실’을 주도하는 김무성 같은 더 노골적인 자도 있을 것이다. 이 ‘교실’에 최근 한국학중앙연구원 원장으로 내정된 이배용 전 이화여대 총장(이명박 정권 시절에는 대통령 직속 기관인 국가브랜드위원회의 위원장이었다)이나 이명희 교수 같은 사람이 초청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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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웹진 ‘빨간 우체부’에도 실렸습니다. 글의 표제와 본문 및 삽화 일부는 슬로우뉴스 편집원칙에 따라 수정하고, 보충했습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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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이재빈
초대필자, 조선시대 전공

축구를, 정확히는 리버풀을 좋아하는 사람. 대학원에서 조선시대를 전공하고 있어서 축덕질할 때는 영어를, 공부할 때는 한문을 읽어야 하며 내 글을 써야할 때는 한글로 써야하는 불우한 경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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