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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만 같다. 지리산의 품에 안겨 보냈던 사흘 동안은 흡사 밀월여행 같았다. 다른 생각은 모두 막혀 버리고 온통 ‘너에게’ 집중했던 그 여행처럼, 지리산을 오르고, 내리고, 산이 내어주는 경치에 감탄하고, 그 험난함에 허덕거리고, 땀 흘리며 그렇게 보냈다.

등산에 취미 붙인 지 1년여. 올해의 목표를 세웠다. 바로 ‘지리산 종주’. 하지만 일상에 치이다 보면 온전히 삼일을 산에서 보낼 엄두를 내기가 쉽지는 않았다. 그런 기회는 우연히 왔다. 무작정 대피소를 예약한 친구의 초대로, 여름을 보내고 가을을 맞는 시점에 그렇게 지리산 종주의 꿈을 이룰 수 있었다.

지리산 국립공원 탐방로와 입산시간 안내
지리산 국립공원 탐방로와 입산시간 안내

지리산 종주는 보통 전남 구례군 화엄사에서 시작해서 노고단에서 능선을 타고 지리산 자락의 동쪽 천왕봉에 올랐다가 내려오는 코스로 구성되는데, 최근에는 노고단 바로 밑 성삼재에서 시작할 수 있어서 한결 수월해졌다. 화엄사에서 노고단에 이르는 코스만도 4시간 산행길이라고 하니 성삼재에서 시작하면 반나절의 시간을 벌 수가 있다. 우리 일행은 ‘성삼재 ~ 노고단 ~ 임걸령 ~ 화개재 ~ 연하천 (1박) ~ 벽소령 ~ 세석 (2박) ~ 장터목 ~ 천왕봉 ~ 중산리’로 이어지는 2박 3일 코스를 택했다. 첫째 날 13Km가 좀 넘고 둘째, 셋째 날이 10Km 쯤 되는 거리다.

그런데 ‘지리산 종주’는 산을 오르는 2박 3일이 다가 아니다. 떠나기 전 일주일, 다녀와서 일주일을 꼬박 내 마음을 들었다 놓았다, 들썩이게 했다. 일주일 전부터 검색해서 최근 지리산 종주를 다녀온 블로거들의 글을 꼼꼼히 읽었다. 마치 종주를 다녀온 느낌이다. 여기저기서 경험담을 통해 조언 한 대로 준비물을 챙기고, 일정을 짜면서 마음을 먼저 지리산에 보내 놓았다. 다녀와서도 한동안, 지리산에 머물러 있는 마음 한 조각 불러오느라 먼 산을 바라보아야 했다.

드디어, 산행이 시작되는 날. 2박 3일, 생존에 필요한 짐들을 꾸역꾸역 배낭에 싸 넣고 보니 뚱뚱한 배낭이 어깨에서 허리까지를 모두 차지해 버렸다. 무게도 만만치 않았다. 성삼재에서 배낭을 메고 대망의 지리산 종주를 시작했는데 노고단에 이르기까지 한 시간여를 다른 생각할 틈 없이, ‘과연 이 배낭을 메고 종주를 할 수 있을까…’ 걱정만 한 가득이었다. 산행 자체가 어렵다기보다는 배낭의 무게감이 어깨를 짓누르고 앞으로 향하는 목덜미를 잡아채는 느낌이었다.

노고단 고개의 운무 2013년 08월 30일
노고단 고개의 운무
2013년 08월 30일

한 시간여를 지나 노고단에 오르니, 능선의 물결이 펼쳐지고 그 사이로 구름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지리산의 참 맛이란 이런 것이려니 싶었다. 첫날의 목적지인 연하천까지 산을 올랐다 내려갔다, 다시 오르고, 산세에 감탄하기를 반복했다. 해가 기울기 시작할 때쯤 연하천 대피소에 도착했다. 지치고 배고플 때 도착한 그곳은 고향집만큼이나 반갑고 정겨웠다. 첫날, 배낭 무게에 제법 고생을 했던지라 가지고 간 음식을 최대한, 먹을 수 있는 만큼 꺼내 먹었다. 한여름 늦더위에 지친 우리들에게 지리산은 가을을 선사해주었다. 서늘하고 맑은 가을과 함께 피곤한 몸을 뉘이고 어느 틈엔가 깊은 잠에 빠졌다.

끝없이 펼쳐진 지리산 산자락2013년 08월 31일
끝없이 펼쳐진 지리산 산자락
2013년 08월 31일

둘째 날은 그야말로 지리산 자락을 오르락내리락 하며 온전히 하루를 보냈다. 아침 먹고 연하천 대피소를 출발하여 세석까지, 약 10 Km 정도를 걸으면 되었다. 시간도 넉넉하니 ‘유람 삼아’ 산행을 하면 되려니 생각했던 건, 산을 쉽게 생각한 등산 초보의 오산이었다. 벽소령 대피소에서 점심을 먹고 하늘과 구름에 취해 잠시 ‘소풍’ 같은 즐거움에 빠졌지만, 곧 험난한 코스가 이어졌다. 지리산 능선은 평평해서 쉽다던, 남들의 경험담은 모두 등산 고수들의 평가였던 가보다. 산은 결코 쉽거나 만만하지 않았다. 험난한 코스가 이어지는 산행에 땀을 쏟아내며 지쳐갈 때 즈음에, 세석 대피소에 도착했다. 세석 대피소는 삼겹살집 같았다. 테이블 잡고 다들 삼겹살을 굽고 찌개를 끓이며 왁자지껄 그날의 산행 얘기로 피로감을 날려 보내고 있었다. 그건 마치 기름 찌든 때를 수세미에 세제를 묻혀 닦아내면 말끔해지는 것처럼 하루 종일 산길을 걷는 것의 고단함을 거둬들이는 주문처럼 들렸다.

세석평원의 들풀과 들꽃들 2013년 09월 01일
세석평원의 들풀과 들꽃들
2013년 09월 01일

다음날 새벽, 길을 나서는데 세석 대피소에 눈썹달과 별이 너무나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별자리 이름은 잘 모르지만, 옆 팀의 사람들이 ‘오리온자리’라고 했다. 그래, 지리산의 하늘에서 내가 바란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싶었다. 그러나 지리산은 그 이상을 허락하지 않았다. 물론 세석평원의 들풀과 꽃들도 아름다웠고, 장터목을 지나 천왕봉에 오르는 동안 감탄이 절로 나는 모습들이 있었지만, 안개와 구름으로 떠오르는 태양도 가려 버렸고 능선의 물결도 보기 힘들 정도로 마음을 닫고 있었다.

천왕봉 오르는 길2013년 09월 01일
천왕봉 오르는 길
2013년 09월 01일

그래도 고마웠다. 삼일 동안 함께 해준 그 넉넉한 품은 정말로 푸근했다. 언젠가, 다시 또 당신께 오리라. 사는 게 힘들 때, 마음이 답답할 때, 기력이 쇠할 때, 저절로 눈물이 날 때, 당신과 함께했던 구석구석, 장면 장면을 기억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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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댓글

  1. 해마다 거르지않고 종주를 했었는데 올해는 산자락 근처를 밟아본지가 언제인지…. 생각만해도 설레임에 가슴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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