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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착오적인 ‘신문의 자유’

<한국일보> 사태의 와중에 회사가 기자들을 배제하고 따로 발행하는 신문에 실린 한 칼럼이 화제다. ‘언론의 자유, 신문의 자유’라는 제목이 붙은 이 칼럼은 그 내용으로 보아 회사(사주)쪽 입장을 반영하여 쓴 것으로 짐작된다. 필자는 사주/발행인의 권리와 편집인/기자의 권리가 구분된다는 점을 강조하며, 기자들이 갖는 언론의 자유는 사주가 갖는 ‘신문의 자유’에 종속된다고 주장한다. 그런 주장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지를 검토해 보자.

이 칼럼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 부분에서 대표적으로 드러난다.

발행인의 의견과 주장을 담은 신문으로 시장에서 경쟁, 사회적 영향력과 상업적 이익을 얻는 것이 신문의 자유의 본질인 것이다. 따라서 사기업인 신문에서 기자들의 언론 자유는 발행인의 권리와 신문의 노선, 방침에 의해 제약된다.

이 부분을 읽으니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반갑지 않을 수가 없다. 나는 이게 옳은 이야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옳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노엄 촘스키를 읽어보면 알 수 있다.

촘스키는 <여론 조작(Manufacturing Consent)>에서, 미디어는 가진 자들이나 특권 계층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아젠다를 주입하고 방어하려는 ‘사회적 목적’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까탈스럽고 고집불통이며 구석구석 참견 안 하는 데가 없는 자유로운 언론은 얼핏 보면 진실을 밝히고 민주적 과정을 촉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미디어의 뒷돈을 대는 가진 자들의 이익을 관철하려는 선전 기구의 역할을 수행하는 데 더 가깝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으로 위의 칼럼을 보면 아주 잘 이해가 된다. 필자가 말하는 것은 ‘신문이란 결국 발행인(개인)의 의견과 주장을 담는 것’이란 말이고, 그런 신문사에서 기자들이 아무리 노력해봤자 발행인의 손바닥을 벗어날 수 없거나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몇 대에 걸쳐 신문사와 관련 기업들을 소유해온 사주나 발행인들이 우리 사회에서 약자나 못 가진 자들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들은 ‘밤의 대통령’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다. 결국 위 칼럼의 주장은 촘스키의 인식을 거칠게나마 그대로 투영하여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같은 내용을 말하면서도 그 방향에 차이가 좀 있다. 촘스키는 이것이 잘못된 일이라고 비판하는 데 비해, 이 칼럼의 필자는 이것을 당당히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촘스키 식으로 말하자면, 자기네 신문이 가진 자와 특권층의 이익을 관철하는 선전 도구이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하고 있는 셈이다.

언론의 자유가 ‘신문의 자유’로 틀어진 이유는?

이 칼럼은 용어의 엄밀한 사용을 강조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러니 여기서도 그런 방식을 따라 보자.

필자는 “개인의 표현의 자유와 신문 등 언론의 자유를 명확히 구별하지 않은 탓이다”라고 하고 또 “진보 성향 신문과 언론학자, 문인 등이 한국일보를 걱정한다며 쓴 글에서 선의든 악의든 둘을 혼동하고 있어서다”라고 했다. 이어서 맨 앞에서 인용한 것처럼 발행인이 갖는 ‘신문의 자유’를 거론한다.

우선 여기서 ‘신문의 자유’가 대체 무슨 말인지부터 궁금해진다. 헌법학에서든 언론학에서든 그런 표현은 아주 낯선 것이기 때문이다. freedom of newspaper를 말하는 것인가? freedom to publish newspapers를 말하는 것인가? 어떤 것이든 ‘신문의 역사가 오랜 서구 언론 선진국'(필자의 표현)에서는 그런 말을 쓰지 않는다. 그냥 언론의 자유(freedom of the press) 아니면 표현의 자유(freedom of expression) 아니면 발언의 자유(freedom of speech)다. 귀찮으면 freedom of를 free로 바꾸기도 한다. 그래도 free newspaper 같은 말은 없다. 이렇게 쓰면 공짜 신문이라는 뜻이 된다.

칼럼 필자가 이 말의 근거 비슷한 것으로 제시한 것은 다음 부분뿐이다.

참고로 독일 헌법은 “모든 사람은 자유로이 의견을 표현하고 전파하는 권리를 지닌다. 신문의 자유(Pressefreiheit)와 방송 보도의 자유는 보장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한결 또렷하다.

이것은 ‘선의든 악의든’ 잘못 옮겨진 글이다.

필자가 써 보인 독일어 단어 Pressefreiheit는 글자 그대로 freedom of the press, 즉 언론의 자유다. ‘신문의 자유’가 아니고 말이다. 독일 헌법의 영역본에도 그렇게 되어 있다. 공식 영역본인 ‘Basic Law for the Federal Republic of Germany’의 해당 부분은 다음과 같다. (밑줄은 칼럼 필자가 인용한 부분.)

GermanyConsti

이것을 ‘신문의 자유’라고 하면, 독일에서는 잡지나 계간지나 부정기 간행물이나 책을 발간할 자유가 없어진다.

또 미국에서 언론 자유를 규정한 수정헌법 제1조도 마찬가지다. 여기서는 “the freedom of speech, or of the press”라는 표현을 썼다. 전자는 광범위한 표현의 자유를, 후자는 이를 구체적으로 실행하는 대표적 방식의 하나인 언론의 자유를 말한다. 그 정도로 press가 나타내는 의미 영역이 넓다.

이 freedom of the press 규정 때문에 신문은 물론이고 잡지 등 정기간행물, 통신, 방송, 인터넷 매체 등의 자유가 모두 보장된다. (구체적인 보장 정도는 매체에 따라 각기 다를 수 있다.) 미국 대법원장 에반스 휴즈는 1938년의 판결에서 “역사적인 맥락에서 볼 때 the press는 정보와 의견을 전달하는 모든 종류의 출판물을 다 포함한다”라고 명시한 바 있다(Lovell v. Griffin). 또 대법원 판사 윌리엄 더글러스는 1973년의 판결에서 “텔레비전과 라디오는 모두 수정헌법 제1조에 규정된 ‘press’의 개념에 포함되는 것으로 본다”라고 말했다(CBS v. Democratic National Committee).

칼럼의 필자는 이렇게 광범위한 언론을 가리키는 말 press를 왜 구태여 신문이라고 축소하여 표현하였을까. 잘못된 번역을 동원하면서까지 말이다. 이 칼럼이 신문사 발행인이나 사주의 배타적 권리를 주장하고 있는 점과 관련지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수백 년 전의 주장이라면 맞을 수도

칼럼은 이렇게 서두에서 ‘개인의 표현의 자유’와 ‘신문 등 언론의 자유’를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후 칼럼은 표현의 자유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그저 ‘언론의 자유’와 ‘신문의 자유’를 구별하고, 일부 문인이나 학자들이 그런 구분을 하지 못하고 혼동한다고 나무란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신문의 역사가 오랜 서구 언론 선진국에서는 개인의 자유로운 신문 제작· 발행을 통해 다양한 여론을 형성하도록 보장하는 신문의 자유가 언론 자유의 핵심이다. 발행인의 의견과 주장을 담은 신문으로 시장에서 경쟁, 사회적 영향력과 상업적 이익을 얻는 것이 신문의 자유의 본질인 것이다.

지금이 200~300여 년 전의 정론지(政論紙, 정치적인 기사나 사설, 논평 따위를 주로 다루는 신문) 시대라면, 이런 주장이 납득할 만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서구의 초기 신문은 발행인 개인의 정견을 전파하는 정치적 도구로서 기능했다. 17세기 영국에서 나온 최초의 신문들이 그런 모습이었다. 뉴스가 실리기는 했지만 정견을 합리화하는 것들만 취사선택되어 지면에 올라갔고, 뉴스보다는 논설이 훨씬 더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 이러한 정견은 공공의 이익보다는 개인이나 정파의 이익을 지향했다. 신문 발행이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도구였다는 점을 상기하면 좋을 것이다. 권력을 가진 정치 단위는 자신들의 정책을 홍보하기 위해 신문을 만들거나 지원했고, 이에 반대하는 이해관계를 가진 세력들은 또 그런 입장을 홍보하기 위해 신문을 펴냈다. 이렇게 정치 성향이 강하게 드러난 신문의 전통은, 19세기 중반에 내용과 판매 방식을 크게 바꾼 ‘페니 프레스(penny press)’가 등장하기까지 계속되었다.

미국 땅에서 발행된 최초의 신문이라고 할 수 있는 <Publick Occurrences> (1690년).

미국 땅에서 발행된 최초의 신문이라고 할 수 있는 <Publick Occurrences> (1690년).

이와 같은 상황에서는 위 칼럼이 말한 ‘개인의 자유로운 신문 제작, 발행을 통해 다양한 여론을 형성하도록 보장’하는 일이 중요하다. 이를테면 권력을 가진 측이 자신에게 유리한 의견을 싣는 신문만을 허용하고 자신을 비판하는 신문은 허용하지 않는다면, 민주주의에 큰 장애를 가져오게 된다. 편향된 의견과 사실만을 내는 신문들이라도 그 수가 많아지면 사회 전체로 볼 때는 전체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된다. 미국 법학자이자 판사인 러니드 핸드는 1943년 판결에서 이런 점을 “혀가 여럿이어야 올바른 결론에 도달할 가능성이 더 커진다”라고 실감나게 표현했다(Associated Press v. United States).

이러한 역사적 맥락을 고려할 때, 위 칼럼처럼 ‘신문의 자유’를 절대화하는 주장은 두 가지 점에서 시대착오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신문의 자유가 언론 자유의 핵심’이라는 주장은 언론이라고 할 게 개인이 찍어낼 수 있는 출판물밖에 없을 때나 적용할 수 있는 이야기다. 언론의 자유가 법에 규정된 시기, 이를테면 1790년대 미국의 매체 상황은 지금과 완전히 다르다. 지금은 종이 한 장 쓰지 않고 인터넷을 통해 발행되는 블로그도 보호되어야 할 언론의 자유 범주에 들어간다. 그 보호 대상들이 ‘핵심’이라는 말로 등급화되어서는 안 된다. 필자가 한 말을 ‘과거에는 신문의 자유가 언론 자유의 핵심이다’라고 고친다면 이해는 할 수 있다.

둘째, 이러한 언론 자유는 그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민주주의가 제대로 기능하도록(functional democracy) 하기 위한 장치요 안전판으로서 도입되고 보장되었다는 점이다. 출판물의 내용에 대한 윤리적 규약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고 왜곡, 선전, 선동이 활자로 찍혀 쏟아져 나왔던 시대에는 그럴 자유를 더욱 보장함으로써 사실이 거짓을 압도하기를 기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다양한 의견이 규제를 받지 않고 공공 토론의 장에 등장하여야 대중이 이들을 평가하고 올바른 선택을 내릴 수 있다는 믿음이 반영된 것이다.

현대 언론 대부분이 지향하는 모습은 강력한 정파적 견해의 발전소가 아니라 공정한 보도로 독자의 판단을 돕고 공동체의 이익을 실현하도록 뒷받침하는 기관이다. 사주나 발행인이 18세기 식으로 자기 이해관계에 따라 회사의 조직과 지면을 마음대로 주무른다면, 현대 언론의 존립 근거라 할 공정성이 근본적으로 충족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현대의 신문은 정론지 시대처럼 개인이 혼자 쓰고 찍고 배포할 수가 없다. <한국일보>처럼 숙련된 노동자들을 사용하여 고도로 조직화하며 뉴스를 생산해야 한다. 이것은 상당한 재정적 자원을 필요로 하는 사업이다. 오늘날 이론적으로는 누구나 신문을 만들 수 있지만, 실제로 신문사를 창업하여 경영할 수 있는 사람은 돈이 많거나 돈을 많이 끌어 올 수 있는 사람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아득한 과거의 규범을 오늘날 그대로 적용하여 ‘신문의 자유’를 절대화하면, 언론의 자유란 결국 신문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자본이 있는 사람들만의 자유가 되어 버린다. 이것은 민주주의가 제대로 기능하도록 하는 장치가 아니라 그 반대로 기능하는 장치가 되는 셈이다. 언론의 자유를 도입한 본질적인 취지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국 신문 <더 데일리 텔레그래프>의 편집국. (사진: David Sim, CC BY)

영국 신문 <더 데일리 텔레그래프>의 편집국. (사진: David Sim, CC BY)

정론지 시대 ‘신문의 자유’는 오히려 언론의 자유 억압 요소

이러한 점은 현대 언론 자유의 내용을 규명한 다양한 자료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예컨대 프리덤 하우스(Freedom House)가 해마다 펴내는 권위 있는 언론 자유 지수(freedom of the press)에 비추어 보자. 여러 나라 언론 자유의 정도를 어떻게 평가했는지를 설명한 Methology(2012년, pdf)는 판단 기준으로 세 분야, 23개 항목을 들고 있다. 그 중 위 칼럼이 ‘언론의 자유의 핵심인 신문의 자유의 본질’이라고 한 ‘신문을 펴내 시장에서 영향력과 이익을 얻는 것’과 관련된 기준은 폭넓게 잡더라도

A-6: 개인이나 기업이 암묵적인 압력 없이 합법적으로 언론사를 세우고 운영할 수 있는가?
B-3: 공식적이거나 비공식적인 검열이 존재하는가?
C-4: 뉴스를 제작하고 배포하는 수단에 제한이 존재하는가?
C-5: 언론사를 세우고 운영하는 데에 과도한 비용이 요구되는가?

등 네 개 정도다. 반면에 기자들이 자유롭게 취재하고 기사를 써낼 수 있는가와 관련된 기준들은 A-2, A-5, A-8, B-4, B-6, B-7, C-7 등 일곱 항목이다.

이러한 척도들은 우리 시대에 중요한 언론 자유의 내용이 무엇인가를 잘 보여준다. 기자들이 각종 압력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취재하고 보도할 자유가, 개인이 신문을 만들어 돈을 벌고 영향력을 얻을 자유만큼, 혹은 심지어 그보다 더 중요하다는 뜻이 되겠다.

뿐만 아니라, 정론지 시대식의 ‘신문의 자유’를 부정적으로 판단하는 기준도 있다. 즉,

B-1: 언론사가 전달하는 뉴스나 정보에 정부나 특정한 정파의 이해관계가 얼마나 반영되는가?
C-2: 소비자가 뉴스의 공정성을 판단할 수 있도록 매체의 소유 구조가 투명하게 공개되어 있는가?

등이 그렇다. 정부나 특정한 정파가 마음껏 편파적인 정견을 쏟아낼 수 있었고 소유 구조의 투명성 따위는 신경쓰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 위 칼럼이 말하는 정론지 시대의 ‘신문의 자유’였다. 오늘날 그런 자유는 오히려 언론의 자유를 억압하는 요소가 된다.

칼럼에서 수백 년 전에나 어울릴 내용이 현재시제의 언어로 쓰인 이유는 짐작이 된다. 의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사주와 기자들이 대립하고 있는 <한국일보> 사태의 와중에서 결과적으로 사주의 권리를 절대화하고 기자들의 편집권을 깎아내리는 주장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갖게 되는 짐작이다.

신문사 사주가 영리를 추구하는 올바른 방법은?

그럼 신문사는 공익을 추구한다는 허세나 부리다가 망해도 좋다는 말인가? 언론사 사주나 발행인은 자기 돈으로 회사를 차리고도 아무런 권리를 갖지 못하고 남 좋은 일만 시키란 말인가? 이런 질문을 필자의 말대로 하자면 아래와 같이 된다.

언론이 경영진의 간섭에서 자유로워야 하고, 개인의 이익 창출에 사용돼서는 안된다는 말이 도무지 이상하다. 그러면 미국 언론 소유주들은 도대체 뭘 위해 애써 언론을 경영하고 책임과 위험을 부담하는지 묻고 싶다.

언론사가 비영리 공영 매체가 아닌 한, 이윤 추구를 하는 것을 무조건 나무랄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필자의 질문은 납득이 되는 바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어떻게 이익을 창출할 것인가이다.

간단히 말해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사주가 기자에게 사사로이 취재를 지시하고 자신이나 광고주에게 불리한 기사를 고치거나 삭제하고 광고주를 ‘핥아주는’ 기사를 발주하고 논란이 되는 취재는 허가하지 않고, 이러한 지시에 따르지 않는 편집진은 인사 조처를 가하는 등, 편집에 적극 개입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할 수 있다. 사주 개인이 ‘신문의 자유’를 맘껏 누리는 형태라 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경영상의 목적으로 편집에 개입하는 일을 절대 벌이지 않고 기자들이 회사의 방침과 개인 및 직업 집단의 저널리스트적 윤리에 따라 취재를 수행하고 보도하도록 보장함으로써 독자로부터 신뢰를 얻고 공정한 언론사로 인정받으며 영향력을 획득하고 이윤을 창출하는 것이다.

무엇이 바람직한가는 구태여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나름대로 틀을 갖춘 서구의 언론 중에서 전자와 같은 방식으로 이윤을 추구하는 매체는 찾기 어렵다. 이것은 이미 언론이 아니기 때문이다. ‘편집권의 독립’ 같은 이슈가 서구 언론에서 문제되는 경우가 드문 것은 법 이전에 이런 규범적인 상식이 정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해를 하면 안 된다. 신문사에서는 기자들이 취재하고 써 낸 기사를 무조건 다 지면에 실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기사에 대한 검토는 얼마든지 이루어질 수 있고 필요에 따라 기사가 ‘킬’ 될 수도 있으며 취재 지시가 내려질 수도 있다. 사설이나 칼럼의 방향이 논의될 수도 있고 그 논조가 조율될 수도 있다. 이것은 편집국의 일상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 모든 것이 편집국 안에서 벌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상업적, 정치적 압력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경영의 영향을 배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편집국 책임자의 위치가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두 <가디언>의 차이

조슈아 서티스는 영국의 대표적인 신문의 하나인 <가디언>에서 팩트 체커(editorial researcher)로 일하며 가끔씩 글도 실었다. 최근 그는 영국 <가디언>을 떠나, 카리브해 연안의 작은 섬나라 트리니다드 토바고에서 발행되는 같은 이름의 신문으로 직장을 옮기고 정식 기자가 되었다. 그는 7월15일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영국 <가디언>을 떠나 <트리니다드 가디언>에 합류한 지 2주가 지났다. 두 회사 사이에 있는 공통점과 차이점을 벌써 짐작하게 됐다. 좀 극적인 상황을 겪으면서다.

(중략)

그럼 차이점은 뭘까. 간단히 말해 소유 형태의 특성이다. 영국 <가디언>에서 편집권의 독립은 소유주인 스캇 트러스트(회사)가 유지하는 핵심 가치 중 하나다. 그러나 <트리니다드 가디언>에서 편집권 독립은 소유주의 경제적 이해관계에서 나온 요구와 밀고당기며 치열하게 싸워야 얻어낼 수 있는 것이다. 최근까지는 편집권의 자유 쪽에 무게가 실렸었다. 정부 여당 고위층을 다룬 정치적으로 민감한 기사들이 자유롭게 실렸다.

그러나 (이런 기사가 나가고 난 뒤) 소유 회사의 이사진은 지난 주 편집국장에게 한 달 동안 자리를 떠나있으라고 요청했다. 편집국 방침을 재조정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이런 사실이 알려진 뒤, 세 명의 중견 기자들이 언론 자유에 대한 침해에 항의하며 작업을 중지했다. (중략) 많은 사람은 정부가 또 다른 폭로 기사를 막기 위해 이 신문의 소유 회사에 압력을 가한 결과라고 믿는다.

이렇게 사주가 편집국의 지면과 인사에 개입하는가의 여부가 서티스가 체험한 선진국 <가디언>과 후진국<가디언>의 차이였다.

신문사는 사기업이므로 사주 마음대로?

위 칼럼이 사주의 ‘신문의 자유’를 강조하는 주장을 잘 살펴보면, 신문사를 하나의 사기업으로 보는 시각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회사에서는 사장이 주인이고 갑이다. 내가 만든 회사, 내 맘대로 하는 게 자유 아닌가?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곳이라면 일반 기업도 그런 유치한 발상으로 경영이 이루어지는 데는 드물겠지만, 언론사는 더욱 그렇다. 이것은 언론사가 생산하는 상품이 여론에 큰 영향을 미치는 특수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일보> 사태에 대해 유진룡 문화체육관광부 장관도 “언론 성격과 사기업 성격을 같이 갖고 있어서 좀 더 신중히 지켜본 뒤 정부가 나설 부분은 나서야 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언론 기업의 특수성을 잘 볼 수 있는 예가 있다. 서구 선진국들은 18~19세기 정론지 성격의 신문들에 보조금을 지급한 일이 있다. 미국의 경우 1860년까지 보조금을 지급했다. 이것은 위에서 말한 대로, 되도록 많은 의견이 공공의 장에 나와야 국민이 판단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이것은 수백 년 전뿐만 아니라 지금도 벌어지는 일이다. 한국 정부도 칼럼의 필자가 말하는 ‘사기업’인 신문사들에게 꾸준히 보조금을 지급해 왔다. 바로 지금 국회에서 논의하고 있는 ‘신문진흥특별법’의 핵심 중 하나도 돈을 모아 침체에 빠진 신문사들을 지원하자는 것이다. 국민이 낸 혈세로 벌어지는 일이다.

신문사들은 이러한 보조금 방안을 적극 찬성할 뿐만 아니라 갈구하고 있다. 지난 4월 신문의 날에 <한겨레>가 쓴 사설의 제목은 ‘신문의 위기, 지원과 자성의 양 날개로 극복해야’이다. 여기서 지원이란 정부가 재정적으로 도와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만일 신문사가 사주나 발행인 개인의 ‘신문의 자유’에 의거해 마음껏 좌지우지할 수 있는 일반 사기업이라고 주장한다면, 국민이 낸 세금을 모아 주는 이런 보조금 지급은 정당화할 수 없다. 사기업이므로 자본주의 논리에 따라 자본가의 의지대로만 운영되어야 한다면, 경영이 어려워질 때 신문업의 특수성을 거론하면 정부에 손을 벌리지 말아야 한다. 신문진흥특별법과 관련하여 김현기 문화부 미디어정책과장은 “위기의 신문 산업을 국고로 지원해야 하는 것은 맞”다고 말한다. 이게 왜 당연히 맞는 일이 되는가. 일반 사기업과는 다른 특수성이 있기 때문이다.

위 칼럼의 필자는 “따라서 사기업인 신문에서 기자들의 언론 자유는 발행인의 권리와 신문의 노선, 방침에 의해 제약된다”라든가 “사기업과 다른 형태의 신문을 생각한다면 모를까”라고 하면서 언론사의 사기업적 성격을 강조했으나, 이는 한 면만을 보는 시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사주의 ‘신문의 자유’는 기자들의 언론의 자유를 통해 구현된다

서구의 경우 언론의 자유 측면에서 볼 때 발행인의 권리는 이미 수백 년 전에 끝난 문제다. 신문 내고 싶으면 내면 된다. 언론 자유가 제대로 정착되지 못한 나라에서는 여전히 중요한 문제겠지만, 칼럼이 말하는 서구는 물론이고 오늘날의 한국에서도 이러한 문제가 언론 자유를 침해하는 주 요소라고 보기는 어렵다.

19세기 이래 서구에서 언론의 자유는 언론인이 정치적, 상업적 압력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취재, 보도할 수 있는가를 둘러싸고 진전되어 왔다. 미국의 경우 수정헌법 제1조를 놓고 진행되어 온 많은 법리적 판단은 거의 모두 언론의 취재 보도 활동을 어디까지 보장하고 어디부터 제한해야 할 것인가와 관련이 있다. ‘언론이 발달한 서구’에서 언론의 자유란 다시 말하면 취재, 편집, 보도의 자유다. 여기에는 정보에 접근할 권리, 정당한 취재 행위를 방해받지 않을 권리, 기사 작성과 인쇄/방송에 부당한 간섭을 받지 않을 권리 등이 모두 포함된다.

이런 언론 자유 이슈들이 주로 언론사 밖의 정치적, 상업적 압력에 대하여 추구되어야 하는 가치로 주장되고 다투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언론사 내부에서 경영 부분이 편집국의 활동에 간섭하고 기자들의 취재 보도를 제한하는 일이 상식적인 금기로 여겨져 왔기 때문이다. 인사권 같은 것이 경영쪽에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역시 언론의 역할과 소명을 스스로 침해하는 수단으로 악용되어서는 안 된다.

현대적인 의미에서 보자면 사주의 ‘신문의 자유’는 소속 기자들이 자유롭게 취재 보도할 수 있는 자유로 구체화된다고 할 수 있다. 사주가 자신의 회사라는 이유만으로 편집에 개입하며 공정한 보도를 해친다면, 정부가 취재 보도를 제한하는 일을 어떻게 비난할 수 있겠는가. 사주는 자신의 ‘신문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편집국이 자유롭게 취재하고 보도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

그럼 사주나 발행인의 의견은 자신이 만든 신문에 전혀 투영되지 않는가? 얼마든지 반영된다. 기사를 삭제하고 기자의 목을 자르는 방식이 아니라 회사를 설립하고 운영하는 그 자체에서 이루어진다. <조선일보>의 기자들은 자기네 신문이 왜 노무현 정부에 비판적인지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한겨레>의 기자들도 자기네 신문이 왜 박근혜 정부에게 우호적이지 않은지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기자들은 신문사의 성격을 알고 입사한다. 그리고 그런 성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기사와 논평들을 생산한다. 이것이 바람직한 일인가는 둘째치고, 이렇게 회사의 성격은 구성원과 지면에 반영된다.

<한국일보>가 갈 길은 사시가 말해준다

그렇다면 언론 기업 <한국일보>는 어떤 방침을 가진 회사인가. <한국일보>의 기자들은 사주나 발행인이 제시한 어떤 기준을 따라야 하는가.

이것은 <한국일보>의 사시(社是)를 보면 알 수 있다. 이렇게 되어 있다.

춘추필법의 정신
정정당당한 보도
불편부당의 자세

이것이 <한국일보> 사주(정확히 말하면 창업주)가 정해 놓은 회사의 방침이다. 이 신문과 고용 계약을 맺고 있는 직원들은 이러한 방침을 존중하고 따라야 하며, 회사는 이들이 이러한 방침에 따라 정정당당하고 불편부당하게 취재, 보도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 그게 그 자신이 설정해 놓은 기업의 지향점이기 때문이다.

발행인 개인이 영리적 자유를 누릴 권리가 신문사을 지탱하는 절대 권한인 것처럼 말하는 위 칼럼 필자의 주장에 따른다면 이런 사시는 필요가 없다. 정정당당하게 보도할 필요도 없고 불편부당한 자세를 유지할 필요도 없다. 그저 발행인의 뜻대로 써내면 되기 때문이다. 사시를 ‘불편부당’이라고 내세워 놓고, 신문이란 사주 개인의 것이므로 그의 뜻에 따라 얼마든지 편(偏)하고 당(黨)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만저만 모순이 아니다.

자본가만이 신문의 주인이 될 수 있는가?

글이 길어서 읽으시는 분들은 지루하겠지만, 말 하는 김에 한 마디만 더 하자.

위 칼럼의 필자는 “‘주인 없는 신문’은 대개 좌파로 기우는 것이 서구와 우리의 경험이다”라고 했다. 이것이 왜 문제인지, 또 어떤 근거에서 나온 말인지 궁금하다.

좌파 언론이 그 자체로 문제가 아닌 것은, 우파 언론이 그 자체로 문제가 아닌 것과 똑같다. 회사의 경향성이 사실을 왜곡하는 방식으로 공정한 보도를 침해하지 않는 한, 어떤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 문제가 될 리 없다. 언론이 어떤 색깔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경계하거나 폄하하는 것은 다양한 가치와 경향이 공존해야 할 민주주의적 시각에서 볼 때 충격적인 주장이 아닐 수 없다. ‘주인 없는 신문’이 좌파로 기울기 때문에 사주의 권리를 옹호하여야 한다는 말은, 뒤집어 보자면 사주의 권리를 옹호하여 좌파 언론이 설 자리를 없게 해야 한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뿐만 아니라 위 주장은 사실과도 거리가 멀다. 칼럼에서 말하는 ‘서구와 우리의 경험’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역사는 그런 근거를 제공해 주지 않는다. 19세기 말에 서구, 특히 미국에서 전개된 금박 시대(Gilded Age)에 온갖 신문이 우후죽순으로 등장할 때, 그 주역 중 하나는 진보 및 좌파 그룹에 속한 개인들이었다. 예컨대 20세기 초반에 미국 사회당의 당원과 지지자들은 전국에서 325종의 일간, 주간, 월간 신문과 잡지를 발행했다. 이들은 대부분 각지의 사회당원 개인이 소유한 매체들이었다. 말하자면 ‘서구의 경험’을 보면 좌파 매체들도 개인이 주인인 상업 언론의 성격을 갖는 일이 아주 흔하였다는 것이다.

또 한국의 신문 경향성을 볼 때 상대적으로 ‘좌파’라 할 수 있는 <한겨레>를 예로 들더라도 ‘주인 없는 신문’은 어불성설이다. <한겨레>에는 수만 주주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다. 이런 회사에 주인이 없다고 하는 것은, 주식회사들은 모두 주인이 없는 무주공산 기업들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사원이 소유한 <경향신문>도 마찬가지다. 노동자가 회사의 주인이다. 신문사는 방씨, 김씨 같은 자본가나 그 자손들 개인이 경영하지 않는다면 다 주인이 없는 것으로 본다는 말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편집국 폐쇄하고 기자 내쫓는 ‘신문의 자유’

8월1일 법원이 <한국일보>에 재산보전처분 명령을 내림으로써 사태는 전기를 맞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하여 얼른 상황이 마무리되고 정상화하기를 기대한다.

나는 <한국일보> 사태를 전해들으며 이 회사의 창업주이자 현 사주의 아버지인 장기영에 얽힌 일화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한 원로 기자는 그를 이렇게 기억한다.

오래 전 일이다. 급히 취재할 일이 벌어졌다. 회사에서 연락을 받고 회사 밖으로 달려나가 택시를 잡으려 하는데, 그날 따라 택시를 찾을 수 없었다.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데 마침 장기영 사장이 나왔다. 그는 “어이 O기자, 왜 그래?” 하고 물었다. 취재 나가야 하는데 차가 잡히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찦차를 당장 내주었다.

내가 보기에 이런 일화는 <한국일보> 창업주가 편집국의 취재 보도 기능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나를 보여주는 상징 같다. 현재의 사주가 언론사 경영자로서 이런 정도의 자세만 갖고 있었더라도 상황은 많이 달랐을 것이다.

지금 <한국일보> 사태는 사실 경영권과 편집권의 갈등으로 출발한 것도 아니다. 현 사주의 비리 행위를 참다 못한 편집국이 나서서 고발한 데서 비롯되었다. 본질적으로 이 사태는 사주가 ‘신문의 자유’를 가지는 것과는 상관이 없는 일로 출발한 것이다.

굳이 관련을 짓자면, 사주가 ‘신문의 자유’를 갖고 있으므로 비리를 고발한 편집국 직원을 인사 처분할 수 있고, 이로 인해 문제가 벌어졌을 때 편집국을 폐쇄하고 용역 직원을 고용해 기자들을 내쫓을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강변하는 정도일 것이다.

이게 필자가 말하는 ‘언론 자유의 핵심인 신문의 자유’인가. 언론인의 주장으로서 놀랍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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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허광준(deulpul)
슬로우뉴스 편집위원

들풀넷 운영자 / 연구 및 강의 노동자, 매체 비평가, 콘텐츠 생산자 / 들풀미디어아카데미 대표 / 과거에 [(원)시사저널] [포린 폴리시(한국어판)] [미디어 미래] [미디어 오늘] 등에서 기자, 편집위원 등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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