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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펄이라는 닉네임을 쓰는 블로거이고, 슬로우뉴스 동인이며, 오프라인 직업은 일간지 기자다. 트위터와 페이스북에선 파리스콤(pariscom)이라는 아이디를 쓴다.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페이스북과 온라인 정체성 문제를 이야기해보고 싶다.

온라인과 천 개의 페르소나

tharikris, "Masks" (CC BY)
tharikris, “Masks” (CC BY)

“인간은 천 개의 페르소나를 갖고 있고, 상황에 맞게 꺼내쓴다.” (칼 구스타프 융)

사람은 실제로 오프라인에서도 여러 개의 자아를 갖고 있다. 다만 온라인에서는 더 강하게 드러난다. 오프라인에서는 아무래도 하나의 몸을 가진 개체에 귀속되기 때문에 여러 가지 페르소나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것이 극단적으로 다르게 나타나거나 하지는 않는다. 이런 경우에는 다중인격이라는 병리학적인 수준으로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온라인에서는 상대적으로 좀 더 수월하게 익명성에 바탕해 여러 가지 자아를 만들어낼 수 있다.

각각의 온라인 미디어별로 생각해보자.

블로그에서는 익명성을 유지하는 것이 가능하고, 용이하다. 그리고 블로그를 통해 특정한 관심 분야에 깊이 있는 글쓰기를 하면 그 분야에 관해 전문가라는 평판을 획득할 수도 있다. 블로그에 자신의 진심을 담은 이야기를 풀어놓음으로써 하나의 정체성, 온라인 자아가 형성된다.

트위터에서도 자신이 원하기만 하면 익명성을 유지하는 게 가능하다. 프로필을 길게 쓸 필요도 없고, 또 여러 계정을 동시에 운영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무의식적으로 학교나 자신이 종사하는 업종, 직장을 털어놓는 들키는 경우가 있긴 하다. 대개 블로그는 한번 더 생각하고 쓰는 정제된 글인데 반해서 트위터는 140자로 쉽게 속마음을 즉흥적으로 털어놓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블로그에서 쌓았던 평판과 다른 면모를 보이는 경우도 생긴다. 가령, 블로그 글은 멋지다고 생각했는데, 트위터에서 쓰는 걸 보니 ‘찌질하다’는 느낌이 드는 때가 가끔 있다.

블로그, 트위터를 쓰는 경우에는 자신의 익명성을 유지하는 게 가능하고, 오프라인에서 여러 가지 자아를 가지고 있더라도 이를 온라인에서 선별해 유지할 수 있다.

페이스북의 반자발적 실명화

그런데 페이스북은?

페이스북은 일단 가입하면 호구조사부터 시작한다. 직장, 학교, 가족 등을 입력하도록 강하게 유도하고, 이용자 대부분 실명을 사용한다. 심지어 실명을 사용하지 않으면 ‘실명을 사용하십시오’라는 식으로 강요하기까지 한다. 더군다나 사용자가 실명인지 아닌지 페이스북은 ‘주민등록번호’를 입력받지 않기 때문에 알 수도 없는데 그런 일이 일어난다.

재밌는 현상은 블로그와 트위터에도 익명성을 유지하다가 페이스북을 사용하면서 실명이 드러나고, 익명성이 무너지는 상황이 자주 발생한다는 점이다. 블로거 친구인 ‘마하반야’는 페북에 페이스북이 실명을 강요한다고 짜증 섞인 게시물을 남긴 적 있다. 마하반야라는 필명이 실명이 아닌 건 페이스북이 어떻게 안걸까. 성을 ‘마’라고 하고, 이름을 ‘하반야’라고 할 걸, 그랬다면 페이스북이 내 필명이 실명이 아니라는 걸 몰랐을 텐데, 라고 마하반야 님은 후회하고 있었다.

페이스북은 원치 않는 실명화를 강요하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일화. 언젠가 ‘이XX’이라는 분이 나에게 친구신청을 한 적 있다. 누군지 전혀 모르는 분이었다. 그러다가 페북을 살펴본 뒤에야 알았다. 2003년에 블로그를 처음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알던 분이었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필명'(닉네임)으로만 알았기 때문에 그분 실명이 ‘이XX’이라는 걸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거의 8년 만에 알게 된 거다.

사람이 대화하고, 우정을 나누면서 굳이 실명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나는 꼭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필명으로 온라인에서 또 오프라인에서 소통이 가능하다면 왜 굳이 실명을 알아야 하는가. 즉, 필명에 자신의 정체성이 담겨 있다면, 굳이 실명을 드러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페이스북에서는 반자발적으로 실명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온라인으로 옮겨지는 오프라인의 권력구조

페이스북이 강요하는 반자발적 실명화의 문제는 뭘까. 우선 무엇보다 자신이 속한 오프라인 권력구조가 온라인으로 옮겨 오게 된다. 그래서 온라인에서도 상시와 부화,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유지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없게 된다.

한번은 페이스북에 오후 2시에 ‘블로그를 하나 더 열었다’는 글을 썼다. 그런데 직장 선배인 이XX 부장님께서 (다행히도) “열정에 존경을!”이라고 써주셨는데,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나는 변명식으로 답변을 달 수밖에 없었다. “이 글을 보고 본업에 충실하라고 따끔한 지적을 하실 줄 알았는데, 격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블로그는 (근무 시간 외에) 언제 언제 사용하겠습니다”라고. 오프라인의 권력구조가 페이스북으로 옮겨오다 보니 이런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런 상황을 피하기 위해 미국의 십대들이 페이스북을 떠난다고 한다. 왜냐하면, 부모들이 와서 친구등록을 하니까. 처음에는 맘껏 페이스북을 운영하다가 부모님이 친구신청을 하면서 그런 공간이 없어지다 보니 페이스북을 떠난다는 기사가 있었다. 그래서 실제로 페이스북 가입자는 절대수에서 줄고 있다고 한다. 십대는 원래 비밀일기도 쓰고, 거기에 일기장을 자물쇠로 잠가두기까지 하는데, 부모들이 페이스북 친구신청을 한다면? 그건 정말 아닌 것 같다.

이런 일은 트위터도 마찬가지다. 어떤 칼럼을 보면 팀장이 자신을 팔로워해서 정말 짜증이 났다는 구절이 나온다. 그런데 그 해당 팀장은 “나는 팀원들 모두를 팔로우하고 있는데”라고 했단다. 참 나쁜 상사의 예라는 생각이 든다. 트위터는 누구나 팔로우할 수 있어서 ‘너 언팔해’라고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지만, 이렇게 오프라인의 권력구조가 온라인으로 그대로 옮겨올 경우에 상당한 문제가 생기게 된다.

페이스북 평균인, 그리고 ‘익명성’의 가치

그렇다면 페이스북에서는 어떤 형태의 자아가 생길까?

페이스북에선 단순히 직장 상사와 부하 직원의 관계만 있는 게 아니다. 회사에선 상사든 부하든 그 페르소나를 꺼내서 쓰면 되지만, 페이스북에서는 나를 둘러싼 다양한 관계망에 있는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다. 즉, 여러 관계망에 있는 사람들이 페이스북에 한데 모여 있다 보니, 내가 그때그때 나에게 맞는 페르소나를 꺼내 쓸 수가 없다.

그래서 페이스북이라는 하나의 가상 신체 속에 자아가 융합되는 형상이 일어난다. 그래서 누구한테나 무난한 인간, 평균인, 그런 자아가 형성된다고 생각한다.

가령, 내 경우를 보자. 페이스북에는 내 친구들은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살펴보면, 크게 온라인과 오프라인으로 나눠서 보자. 일단 온라인은 ‘민노씨’를 통해 알게 된 인터넷주인찾기 동인들, 그리고 트위터를 통해 알게 된 분들, 페이스북을 알게 된 분들, 그리고 블로그를 통해서 알게 된 분들로 나뉜다. 그런데 온라인 인맥만 있는 건 아니다. 페이스북에는 오프라인 인맥이 있다. 우선 회사 선후배 동료들이 있고, 학교 선후배 친구들이 있다. 그리고 회사 OB(Old Boy, 회사를 떠난 선배들)이 있다. 그 뿐 아니라 업무로 알게 된 취재원들, 타사 기자들이 있다.

이렇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페이스북에 한데 모여 있다. 나로서는 각각의 상황에 맞게 꺼내쓰는 가면(페르소나)가 있는데, 이렇게 페이스북에 한데 모여 있다 보니 특정한 관계의 공간 속에서 나눴던 내밀한 이야기들은 페이스북에서 하기 어렵다. 거의 절대로 할 수 없다.

그래서 솔직한 마음을 표현하기가 어렵다. 트위터에서는 그나마 우울하다. 비가 오니까 어떻다. 이런 마음을 표현하는 분들도 있고, 가끔은 ‘자살’을 의미하는 글을 쓰는 경우까지 있었는데, 하지만 페이스북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트위터보다도 개방이 덜 된 폐쇄적인 곳인데, 안에서 보이는 것들은 대체로 무난한 것이 대부분인 것 같다.

가령, 예를 우리 회사 출신으로 문화부 차관을 지낸 신XX 씨가 KBO총재로 내정됐다는 기사가 실린 적 있다. 그 기사를 페이스북에 링크로 걸면서 “사실일까? 사실이라면…”이라고 촌평을 남겼다. 페이스북에 우리 회사 선후배들이나, 우리회사 출신 인맥이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면, “…”으로 말을 줄이지 않고, 솔직하게 의견을 썼을 거다. 본의 아니게 자기 검열을 하게 되는 거다.

한 페이스북 지인은 “페이스북에서는 말을 조심해야 한다. 한 다리 건너 모르는 분도 내가 쓴 걸 보고 오해하고, 기분 나빠할 수 있다”고 쓴 적 있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페이스북에 글을 쓰면서 자기 검열을 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렇다면, 결론은? 우리는 페이스북 평균인으로 만족할 것인가? 페이스북은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네트워크가 맞나? 오프라인 관계를 복제해서 한곳에 모아놓는 게 좋은 것인지 의문을 갖게 된다. 무엇보다 페이스북만 사용하면서 자신의 개성 있는 정체성을 형성해가기는 어렵다고 본다.

그렇다고 페이스북이 다 문제라고 하는 건 아니다. 나도 즐겁게 잘 사용하고 있다. 페이스북은 얇지만 넓은 네트워크 관리를 도와준다. 더불어 페이스북을 통해 오프라인의 관계가 더 돈독해지기도 한다. 나는 지금 페이스북을 떠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진정한 나 자신이라는 정체성을 온라인을 통해 드러내고 싶다면, 페이스북보다는 블로깅을 하는게 좋지 않을까 싶다. 두 블로거 친구의 글을 인용해보자.

'프레이저 나선' (위키피디아 커먼스)
‘프레이저 나선’ (위키피디아 커먼스)

자신의 생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진짜 소통을 원하고 있는데도 본체만체 들은체 만체 계속 겉돌고만 있다. 그러면서 정작 초대받지 않은 트위터 같은 공간에는 어떻게든 끼어보겠다고 머리를 들이민다. 나 소통하러 왔으니 내 예기 좀 들어달라고 계속 말을 건다.

결국, 아이폰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이제 침묵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고 있는 셈이다. 아래 그림에서 보듯이 이 침묵의 소용돌이속에서 아래쪽으로 꺼지는 것은 오프라인상의 대화이고, 위로 계속 말면서 올라오는 것은 온라인에서 쏟아지는 수다들이다. (아거)

온라인에서 만들어내는 창조적인 에너지들은 익명성, 혹은 온라인 실존성이라는 속성과 친합니다. 그 안에서 이상화된 자아, 오프라인을 숙주로 하지만, 그 오프라인의 실존과는 다른 온라인 실존은, 익명성, 새로운 창조를 가능하게 하는 전혀 다른 대지에서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트위터, 특히 페이스북을 통해서 이뤄지는 사귐의 메커니즘은 ‘콘텐츠’가 아니라, 듣보잡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프라인의 표지들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페이스북은 속물적인, 이것은 폄하의 의미가 아닙니다, 인간의 과시 욕구를 자극하는 장치들을 계속해서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아이비리거들의 짝짓기 서비스로  페이스북이 출발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합니다.  (민노씨)

다시 한번 블로그를 생각해보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리고 온라인에서도 실명화되고 있는 서비스에 대해서도 문제를 한 번쯤 제기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익명성’의 가치를 다시 한번 생각해볼 때가 됐다.

[box type=”note”] 이 글은 ‘인터넷 주인찾기’ 세 번째 컨퍼런스 ‘SNS 시대, 블로그의 재발견’ 중 필자가 발표했던 ‘페이스북 평균인’을 퇴고한 것입니다. (편집자) [/b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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