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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전직 대통령의 정상회담 대화록이 공개됐다는 뉴스에 문득 떠오르는 영화가 있군요. ‘하이드 파크 온 허드슨’ (Hyde Park on Hudson)이라는 영화입니다.

루즈벨트를 연기한 빌 머레이
© 2012 Focus Features (사진: Nicola Dove)

한국에서 개봉하지 않은 영화인데, 저는 우연히 비행기에서 봤지요. 빌 머레이가 주연한, 미국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이야기인데, 영국 왕 조지 6세와 엘리자베스 왕비가 영국 왕실로는 처음으로 미국 대통령을 방문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재미있는 영화입니다. 그리고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숨은 연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지만, 당시만 해도 영국 왕실의 미국 대통령 방문은 미묘한 사안이었습니다. 일본 왕이 한국 대통령을 방문하는 것과 비슷한 장면이라고 할까요? 당장의 국력은 미국이 하루가 다르게 높아지고 있지만, 미국 대통령이 오만해 보이면 곤란합니다. 그렇다고 미국 대통령이 머리를 숙이는 모습도 미국 내에서는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영국 왕실도 조심스럽습니다. 당장은 영국 왕실이 과거 대영제국 시절에 견줘 초라해 보이지만, 영국 왕실이 미국 대통령에게 너무 숙이는 모습을 보이면 영국인의 자존심을 건드려 국내에서 정치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독립 이후 애매모호한 영국과의 관계를 풀어야 하고, 빈부격차와 범죄가 창궐하는 미국 사회 개혁을 해내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갖고 있습니다. 조지 6세는 제2차 세계대전의 전운을 감지하고 있습니다. 독일이 영국을 침략한다면, 버틸 방법은 미국의 도움뿐입니다. 이 도움에 대한 확답을 받아내야 하는 어려운 외교적 과제가 수줍어 말을 더듬는 그의 어깨에 얹혀 있습니다.

그들이 대화에 실패한다면, 수억 수천만의 영국인과 미국인들에게는 재앙이 옵니다.

조지 6세가 주인공인 [킹스 스피치]
© 2010 The Weinstein Company
게다가 영국 왕 조지 6세는 말을 더듬는 사람이었습니다. 어엿한 성인이면서도 자신이 하는 일이 아버지에게 어떻게 보일지를 늘 불안해하는 주눅이 든 아들입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몸이 불편해 휠체어를 타고 다녀야 하는 할아버지였습니다. 둘은 이렇게 불완전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둘이 마주 앉아 국가 중대사를 논해야 합니다.

이 영화에서 제게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공식 회담 뒤에 ‘2차’에서 벌어진 조지 6세와 루즈벨트 둘만의 대화였습니다. 공식 만찬을 오랫동안 나눈 뒤, 두 명은 루즈벨트의 서재로 2차를 하러 갑니다. 같이 시가를 피우면서 곤드레만드레가 되도록 마십니다.

시가 연기와 위스키 취기 사이에서 그들은 이야기합니다. 조지 6세는 왜 말을 더듬게 되었는지. 루즈벨트는 왜 똑똑하고 미인인 아내 엘리너와 서먹서먹한지. 이들에게는 어떤 약점이 있고 어떤 컴플렉스가 있는지. 그리고 루즈벨트는 젊은 영국 왕 조지 6세에게 말합니다. “내가 당신 아버지라면, 당신이 자랑스러웠을 거야.” (If I were your father, I’d be proud of you.)

의전이 어떻고, 이해관계가 어떻고, 양국 관계의 힘의 균형이 어떻고 하는 이야기들을 언론에서는 떠듭니다. 그 속에서도, 그 둘의 진심은 날 것 그대로 오갑니다. 술의 힘을 빌려서였을 수도 있겠지요. 오밤중 결점투성이인데다 지나치게 막중한 책임에 어깨가 부서질 것 같은 남자 둘이 의기투합이 되어서일 수도 있고요. 또는 그 순간 서로 아버지와 아들처럼 서로 의지하게 되어서일 수도 있겠지요.

어쨌든 미국과 영국의 관계는 돈독한 우방국인 것으로 확인되었고, 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면 미국이 유럽을 도울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조지 6세는 고국으로 돌아갑니다. 성공적인 외교회담이었습니다.

어떤 첨예한 협상장에서라도, 누군가는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해야 합니다. 가족 사이의 관계에서도, 기업 사이의 관계에서도, 나라 사이의 관계에서도 그렇습니다. 리더들이 서로 마음 터놓는 순간에, 서로 간에 쌓인 신뢰가 바로 그 집단 사이의 중장기적인 신뢰관계에 결정적 영향을 끼칩니다. 많은 정상회담이 부부동반으로 이뤄지고, 때로는 휴양지에서 캐주얼하게 이뤄지고, 초대형 딜은 주로 한쪽 기업의 CEO가 자기 집에 상대방 CEO 가족을 초대해 만찬을 함께 하는 가운데 윤곽이 잡히지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영화 속 루즈벨트와 조지 6세   © 2012 - Focus Features
영화 속 루즈벨트와 조지 6세
© 2012 Focus Features

만일 루즈벨트가 조지 6세에게 했던 “내가 당신 아버지라면…”이라는 말이 모두에게 공개됐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조지 6세가 털어놓은 아버지에 대한 컴플렉스가 그렇게 공개되리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이런 사소한 일로 출발해서, 두 나라 국민들이 서로 자존심에 상처를 주고 정치인들이 으르렁거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이 유럽을 돕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그랬다면 지금 한국은 어떤 모습일까요?

때로는 숨겨야 할 무기가 있습니다. 끝까지 참아야 할 말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뱉어내고 나면, 어떤 것도 지킬 수 없게 될지도 모릅니다. 뭔가를 지키기 위해서는, 지켜줘야 하는 금도라는 게 있는 법입니다.

지금 NLL 관련 정상회담 대화록을 공개한, 또 공개하라는 이들에게 꼭 하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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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댓글

  1. 핑백: gorekun.log
  2. 이소장님 잘읽었습니다. 저도 이 영화를 기내에서 본 기억이 나네요~
    말씀하신 내용 절대공감하고요
    소통을 위한 비언어적 요소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하게 합니다.
    대화록에 숨어있는 행간의 뜻을 왜곡하려는 정치적 음모에 한숨이 나옵니다

  3. 감사히 잘 봤어요 ㅋ
    헌데 왜 새누리당 김무성 서상기 등 이런 애들은 NLL대화록 찾는건 일도 아니고 자기가
    봤다고 했는데 이들은 왜 소식이 깜깜 무소식일까요 ㅋㅋ 어디 짱박혀서 버러우 타셨나요?
    자신있게 포기발언이 아니면 사퇴한다던 것들은 또 없어졌네요?ㅋㅋ 말과 행동이 일치해야지 말따로 행동 따로 보여주기 식으로 하는것들이 국회의원이라니 ㅋㅋ 국민의 세금이 저딴것들의 뱃데기 부르는데 들어가는게 아깝고 드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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