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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로 복잡해져 가는 세상이다. 그래서 더 단순한 것을 찾기도 하지만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다양성’이라는 용어를 접할 일도 많아졌다. 이 글은 다음 질문에 관한 내 소박한 고민의 소산이다.

한국사회는, 그리고 우리의 마음은 진정으로 다양해졌을까?

풍경 하나, 종합선물 세트의 추억 

어렸을 때 또래 친구들의 간절한 바람 중 하나는 종합선물세트를 받아보는 것이었다. 나도 예외는 아니어서 인기 있는 과자란 과자는 모두 담긴 상자를 열어보는 꿈에 부풀었던 기억이 난다. 세월이 흘러 커다란 선물 세트의 꿈은 사라졌다. 대신 대형마트의 과자 더미들로 현기증이 날 지경이 되었다. 이제는 울트라 수퍼 선물세트 박스로도 그 많은 ‘인기 과자들’을 담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비단 과자만이 아니다. 음료도, 샴푸도, 화장품도, 문구도 종류가 급격히 늘어났다. 그리고 소비자의 선택 폭도 그만큼 넓어졌다.

질문이 따라온다. 정말로 소비자의 선택 폭이 넓어졌을까? 물론 물건 종류가 많아졌다는 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무엇을 선택해도 비슷한 결과가 돌아온다면? 그렇다면 과연 ‘선택 폭이 넓어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수십 종의 감자 칩에 들어가는 재료, 칼로리, 염분이 비슷하고, 제품과 관계없이 모두 옥수수 시럽과 같은 원료를 쓰고 있다면? 또 원료를 제공하는 회사들이 기껏 네댓 개에 불과하다면? 그렇다면 진정으로 우리의 선택 폭이 넓어졌다고 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7,80년대를 풍미했던 과자가 담긴 종합선물 세트
7, 80년대를 풍미했던 과자 종합선물 세트

풍경 둘, 똘레랑스 카페의 작은 소동 

‘관용의 정신에도 비관용이 내포되어 있는가?’

위 질문은 최근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바칼로레아(프랑스의 대학입학시험) 문제 중 하나다. ‘관용의 한계는 어디인가’, ‘관용의 정신을 타인에게 강요할 수 있는가’ 등의 질문과 일맥상통한다. 정치 분야라면 ‘극단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에게도 정당을 구성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져야 하는가’, 언론에 적용한다면 ‘헌법상 보장된 표현의 자유를 저해하는 표현도 존중받아야 하는가’ 등의 논제도 가능할 것이다. 많은 사람이 프랑스 교육평가의 깊이에 대해 감탄하고 있는 동안 나에겐 다양성에 대한 관용과 관련된 사건 하나가 떠올랐다. 10여 년 전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의 작은 소동이었다.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 (홍세화, 창비, 1995, 개정판: 2006)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홍세화, 창비, 1995, 개정판: 2006)

1995년 홍세화가 출판한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가 성공을 거두면서, 획일적이고 권위적인 한국사회가 지향해야 할 가치로서 ‘똘레랑스’를 많은 사람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한 네티즌이 포털에 관련 카페를 개설하였고, 관용의 개념과 실천에 관심이 있었던 나는 카페 회원들과의 소통을 통해 똘레랑스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접할 수 있었다(현재는 폐쇄된 카페).

그런데 오래지 않아 카페의 성격에 맞지 않는 게시물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똘레랑스의 개념, 홍세화의 생각 등을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게시물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태는 카페 운영자와 게시글 작성자 사이의 감정적 언사, 포스트 삭제에 관한 공개 논의로 번졌고, 급기야 카페 회원들의 첨예한 의견 대립에까지 이르렀다. 이 상황에서 카페 운영자는 어떤 내용의 글이 올라오든 그대로 놔두어야 하는가? 카페의 지향에 반하는 극단적인 관점까지 용인해야 하는가? 카페가 똘레랑스 가치의 추구를 전면에 내걸었기에 포스트 삭제에 대한 논쟁은 뜨거울 수밖에 없었다.

위 두 이야기는 형식적 측면에서의 다양성 강화와 다양성의 실질 내용 확보 사이의 간극을 잘 드러내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즉, 제품의 종류가 많아지고 ‘똘레랑스’라는 용어가 사회 전반에 통용되는 상황과 제품의 원료, 생산자, 소비자의 다양화 및 특정한 사회 문화적 맥락에서의 똘레랑스 정신 구현 사이의 틈새를 이 두 사례는 보여준다.

제2언어로써 영어를 가르치며 체험한 ‘다양성이라는 신화’

다양성에 대한 논의가 그 어떤 나라보다 활발한 곳은 다양한 문화와 인종이 섞여 있는 미국 사회다. 전 세계에서 모여든 이민자들이 독립전쟁을 통해 세운 나라이기에 다양성은 자유와 맞먹는 사회적 무게를 지닌다. 그래서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와 다언어사회(multilingual society)에 관해 관심 있는 사람들이 많고, 다양성을 실질적으로 구현하는 데 필요한 과제들이 끊임없이 논의된다. 다문화/다언어와 관련된 이슈는 제2언어로서의 영어를 연구하고 가르치는 내가 교실에서 맞닥뜨리는 문제이기도 했다. 중국, 인도, 대만, 파키스탄, 한국, 사우디 등에서 온 학생들이 다양한 문화적, 언어적 배경을 안고 수업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몇 년 동안 교수 경험을 통해 특정 국가나 문화권에 고유한 행동 패턴을 완전히 무시할 순 없지만, 직접적인 소통 없이 학생 개개인을 성급히 판단하는 것은 위험천만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선입견을 품고 학생들을 대하다 보면 결국 마음속으로 예상한 특성들이 재인식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사우디 친구들은 역시 이런 면이 있었어!’라고 말하는 순간 이른바 ‘주류 사회의 시각’을 재생산하는 꼴이 되니 말이다. 이것이 그 황당한 혈액형 담론의 생존방식 아니던가? 이런 의미에서 혈액형 담론의 생성/전파/변형 및 재생산과 저항 메커니즘을 연구해 보는 것은 담론의 질서를 연구하는 매우 흥미로운 방식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다양성은 개별 교실 상황을 넘어 외국어 교육 전반에서도 민감한 이슈다. 예를 들어 전 세계적으로 영어 교재를 출판하는 기업이 아시아 지역에서 교재를 출판한다고 가정해 보자. 회사는 아시아 시장에 특화된 마케팅 전략을 수립하고, ‘세계 공용어’로서의 영어의 위상을 생각함과 동시에 ‘아시아에서 팔릴 수 있는 영어 컨텐츠’를 치밀하게 계산한다.

문화적 다양성이라는 개념을 도입하는 것 또한 필수다. 자칫하면 백인 우월주의에 빠진 교과서를 만들어 낼 수도 있기에 신중하게 사진과 삽화를 고른다. 문화에 대한 표현을 고를 때는 더더욱 주의를 기울인다. 물론 문화간, 인종 간 위계를 나타내는 어떤 증거도 남기지 말아야 한다. 다양한 문화적/인종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동등한 지위를 갖고 대화하고, 서로에 대한 존중은 세련된 모습으로 그려진다. 대화의 장소도 전 세계에 걸쳐 있고, 삽입된 이미지에는 아랍어, 타이어, 한국어 간판도 보인다. 교재가 출판될 지역의 문화에 대한 챕터도 빼놓지 않는다. 이렇게 다양성을 보장하려는 세심한 노력을 통해 하나의 멋진 교재가 탄생한다.

다양성을 생각하는 두 가지 방식: 어휘 다양성과 의미 다양성

M.A.K. 할리데이
M.A.K. 할리데이

기능주의 언어학자 할리데이(M.A.K. Halliday)의 말을 빌리자면 언어의 다양성은 크게 용어 다양성(glossodiversity)과 의미 다양성(semiodiversity)으로 나뉜다. 전자가 어휘, 즉, 표현 방식이 늘어나는 것을 의미한다면, 후자는 언어에 담긴 생각과 사상이 깊고 넓어지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위에서 언급한 교재 제작의 과정에서 용어 다양성을 확보하려는 시도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시아 지역에 맞는 내용이 많아지고, 다문화적인 관점 및 지역에 맞는 시각 자료가 풍부하게 담긴다고 해서 의미 다양성, 즉 진정한 사고의 다양성을 담아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내 경험에 따르면 그렇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우선 영어교재 대부분은 영어 자체의 위상에 대해 좀처럼 질문하지 않는다. 영어가 가지는 문화 자본적 성격, 이에 수반되는 잠재적 폭력에 대해서도 침묵한다. 때로는 영어에 대한 문제점을 ‘살짝’ 언급하면서 장점을 더 크게 부각하는 전략을 통해 영어의 위상 강화라는 목표를 달성하기도 한다.

영어라는 주류 질서가 무시하는 고통

영어라는 주류 질서가 사람들에게 가하는 고통은 드러나지 않는다. 열악한 일터에서 ‘네이티브를 짜증 나게 하는 영어 발음’을 순간순간 의식하며 사회에 대한 분노를 키우는 노동자나 영어를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부당한 차별을 받아야 하는 애리조나 주 이민자의 모습은 좀처럼 그려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영어는 글로벌 시대의 필수적인 의사소통수단입니다!’이라는 슬로건 아래 문화간 인종 간 갈등은 사라지고, 평등하고 조화로운 세계가 등장하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했듯 미국은 다양성을 근간으로 하는 나라다.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에 대한 사회적, 학문적 관심을 보면 풍부한 용어 다양성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의미 다양성을 보장하는가? 즉, 미국 안에서 서로 다른 견해들이 자유롭게 분출되고 뒤엉키며 소통하고 있는가? 혹시 거대한 주류의 목소리 밑에 작은 목소리들이 묻히고 있지는 않은가? ‘흑인’ 오바마가 압승했을 때 미국은 과연 은밀한 인종적 차별을 넘어서는 새로운 가치를 창조했는가?

미국뿐 아니라 한국 상황에서도 영어의 권력에 대해 비슷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새로운 토플(TOEFL)과 토익(TOEIC)을 내놓았을 때 ETS는 새로운 평가의 패러다임을 제시한 것인가? 반기문 총장의 ‘발음이 안 좋아도 통하는 영어’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기존 영어교육과 질적으로 다른 담론을 생산하고 있는 것인가? 문법 위주의 번역식 교육과정이 의사소통을 강조하는 교육과정으로 대체되었을 때 우리 학생들은 실질적인 소통의 기회를 갖게 되었는가? 아니면 우리 사회의 실질적 다양성은 그대로인데 그저 용어들만 화려한 옷을 입은 것은 아닌가?

성찰과 소통, 연대로서의 다양성

몇 년 전에 겪었던 잊을 수 없는 경험을 이야기하며 글을 맺으려 한다. 사회언어학자인 데보라 태넌(Deborah Tannen)의 글을 바탕으로 학생들과 성 평등에 관한 토론을 마친 나는 너무도 당연하다는 말투로 “모든 인간은 평등하며 성별에 따라 사람들을 차별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학생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 이야기에 주목하고 있던 순간, 무슬림(이슬람교도) 학생 하나가 손을 번쩍 들더니 이렇게 말했다. 사실 학생의 당당함을 생각하면 ‘선언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tinou bao, "the eyes can see" (CC BY)
tinou bao, “the eyes can see” (CC BY)

“Men are superior to women.”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해요.)

충격이 컸던 건 이 말을 한 게 여학생이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당황한 나는 약 3초간 아무 말도 못 하고 서 있다가 겨우 말을 이었다.

“나는 너의 의견을 존중한다. 하지만 적어도 미국과 같은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내가 지금 이야기하는 성 평등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리고 나는 성별과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대우받아야 한다고 믿는다.”

‘당연한 상식’이 만나는 다양성이란 벽

이 경험을 통해 ‘지극히 당연한 상식’도 특정한 문화적, 종교적 가치 체계 속에서 도전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배웠다. 아울러, 가치관이 충돌하는 상황에서 어디까지 이야기하고 설득하는 게 교사의 책무일지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이 고민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학생들의 다양한 세계관에 관해 교사로서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하는가? 물론 이에 대한 획일적 대답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수업의 주제, 교실 상호작용의 역학 및 학생 개개인의 성향에 따라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달라질 테니 말이다. 확실한 건 매시간 그 경계를 새로 그어야 하고, 경계를 짓는 행위 속에서 나 자신의 정치 사회적 정체성을 발견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한국사회에서 의미적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뭐 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라는 단순한 인식을 넘어서야 한다. 서로 다른 사회 문화적, 종교적, 학문적, 정치적 성향의 사람들과 끊임없이 소통하고, 우리 안의 획일성을 넘어설 방법을 성찰하며, 다름을 넘어 더 큰 가치를 추구할 수 있는 연대의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성찰하고 소통하며 연대하는 삶만이 용어 다양성을 넘어서서 의미 다양성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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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댓글

  1. 글 잘 봤습니다. 슬로우 뉴스는 제가 거의 매일 방문하는 곳인데, 저도 다문화에 관심이 많거든요. 언어도 그렇고… 괜찬으시다면, 제가 본문을 영어로 번역해서 제 페이스북 페이지 및 제 블로그에 올려도 될까요? 물론, 원전 (이곳 슬로우뉴스)의 링크도 당연히 참조로 넣고요.

  2. 결국 결론을 내지 못했죠. 사람들마다 의견이 분분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최근 여러 사람들이 일베에 관해 논쟁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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